인천광역시는 9월 10일 인천대학교 대공연장에서 고(故)최기선 전 인천광역시장을 기리기 위한 ‘최기선로’ 명예도로 명명기념식 장면(중앙에서 오른쪽 첫 번째 고(故)최기선 전 인천시장 배우자 김영애 베로니카)
인천광역시는 9월 10일 인천대학교 대공연장에서 고(故) 최기선 전 인천광역시장을 기리기 위한 ‘최기선로’ 명예도로 명명 기념식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이번 행사는 인천시 발전에 큰 공헌을 한 최 전 시장의 헌신과 업적을 기리며, 그의 이름을 인천 시민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기기 위해 마련됐다. ‘명예도로’는 실제 주소로 사용되지는 않지만, 지역사회와 관련된 인물의 사회적 공헌도, 공익성, 그리고 지역 역사와 문화적 상징성을 고려해 지방자치단체장이 지정할 수 있는 도로다.
이번에 명명된 ‘최기선로’는 최 전 시장이 인천에 남긴 깊은 영향을 상징하며, 인천의 성장과 발전을 기념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기념식에는 최기선 전 시장의 가족들, 추모회원, 시민 원로를 비롯해 인천시, 인천시의회, 인천시교육청, 인천대학교 등 관계자, 그리고 지역 국회의원들이 참석해 그의 공헌을 회상하고 추모하는 뜻깊은 시간을 가졌다. 황효진 글로벌 도시정무부시장은 축사에서 “길이 끝나는 곳에서도 길을 내는 사람이있다”며 “최기선 전 시장은 송도국제도시와 그곳에 자리 잡은 국립 인천대학교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최 전 시장이 그렸던 이 길은 이제 하늘길, 바닷길, 철길로 인천과 전 세계를 잇는 길로 발전하며, 인천을 국제도시로 만드는 데 중요한 기반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인천시는 이번 ‘최기선로’ 명예도로 지정을 통해 인천 시민들에게 최기선 전시장의 공로를 되새기고, 1,000만 국제도시 인천의 미래를 향한 중요한 발걸음을 내딛는 상징적 계기가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경남 함양군에 처가(배우자 김영애 베로니카)를 두고 있는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경기도 김포에서 태어나 보성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서울법대시절 장학금을 받는 우수한 학생이었으나 당시 유신헌법으로 법관이 될수 없다는 정의감으로 사법시험 응시를 포기하고 운동권 학생으로 옥고를 치르는 등 유신반대운동을 주도 했었다. 이어 1979년에 김영삼 캠프에 합류해 신민당 김영삼 총재 공보비서로 정계에 입문했다. 그후 '상도동계' 핵심가신으로 불렸으며 1988년 4월 경기도 부천에서 1988년 13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정치 행보를 시작했다. 최기선은 국회의원을 지낸 후 1993년 관선 인천시장으로 부임했다가 이후 1995년 민자당 소속으로 초대 민선 인천시장에 당선됐고 그 이후 1998년 2대 민선 인천시장으로 재선 되는등 인천시장을 3번이나 역임했다.
최기선은 1980년 서울의 봄 시기, 군부의 국내언론 보도 통제로 국내로 알려지지 않았던 암울했전 한국의 정치현실을 능통한 영어로 국내상황을 외신들에 쏟아내는 메신저 역할을 톡톡히 했고 그 결과로 전두한 권력을 국외를 통해 견제하는데 많은 역활을 했었다. 이 시기에 김영삼 총재는 자택에 구금되어 단식을 시도 했었고 단식기간이 20일을 넘겨 생명의 위기가 급박하게 다가 왔지만 병원입원을 완강히 거부했던 김영삼 전 대통령에게는 아무도 접근 못했던 상황에 최기선은 손명순 여사까지 물러치고 김영삼 총재를 강제로 입원시켜 생명을 지켰다는 일화도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김영삼 전 대통령은 “최기선 부탁이라면 뭣이든 들어 줘라”는 특명이 있었다는 김덕룡 전 의원의 전언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 성원과 함께 최기선 전 인천시장은 인천국제공항, 인천대교 건설, 시장 재임 중 분규가 끊이지 않았던 선인학원 시·공립화, 정부가 부정적 입장을 보이던 송도신도시 매립승인 및 착공 완료하였고, 경기도 강화·옹진군과 김포시 검단면 편입 등을 통해 인천 발전의 근본 토대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2016년엔 이 같은 내용을 담은 회고록 '최기선, 인천시대를 열다'를 출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