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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천의 風水談論 코르티츠, 파리를 구하다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8/11/12 [09:58]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실용풍수학회 회장 © 함양신문

 

인류 최고의 문화유산 파리(PARIS)

유럽의 중심 파리는 중세와 르네상스시대의 건물부터 초 현대식 건물이 공존하는 예술과 관광의 도시, 유행과 명품과 쇼핑의 도시 등 수많은 수식어로 불리며 보고 또 보아도 끝이 없고, 질리지 않으며 탄성만 나오는 도시다.

파리는 가 볼만한 곳이 너무 많지만 전문가들이 추천하는 꼭 가 봐야할 10곳을 꼽으면, 에펠탑, 개선문, 사크레 쾨르성당, 루브르 박물관, 오르세 미술관, 샹젤리제거리, 노틀담 성당, 베르사유 궁전, 몽생미셜 수도원, 스트라스부르의 쁘띠 프랑스 등이 있다.

그중 세계 최대의 박물관인 루브르의 경우 건물 외관도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225개의 방에 30여만 점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고, 그 규모가 방대하여 제대로 보려면 최소한 일주일은 걸린다. 유명한 상표로는

 

 

샤넬, 루이비통, 에르메스, 까르띠에, 로레

(화장품), 크리스찬 디올, 에비앙(생수), 빠리에(탄산수), 헤네시(꼬냑) 등이 있다.

 

히틀러의 폭파명령을 거부하다

그러나 위와 같은 인류 문명의 보고(寶庫)이자 세계의 문화유산도 2차 세계 대전 당시 히틀러의 광기어린 명령에 의해 파괴될 운명이었으나 아이러니하게도 폭파 직전의 파리를 구한사람은 적장(敵將)인 코

르티츠 장군이다. 후일 온 인류가 존경 하

는 인물이 된 나찌 독일의 파리점령사령관 디트리히폰 코르티츠 장군은 히틀러의 폭파명령을 거부하고 저항 없이 연합군의 포로가 되면서 파리를 구한 것이다.

 

33일 만에 프랑스의 항복을 받다

프랑스의 면적은 643.80로서 남한 면적의 약 5.5, 인구 6700만 명(2017

 

 

기준)의 서 유럽에서 가장 넓은 국토를 가진 나라이자 나폴레옹 시절엔 유럽을 제패한 군사강국이었으며, 2차 대전 당시에도 탱크, 대포 등 군사력이 독일보다 결코 약하지 않았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의 침략에 대비하여 7400의 마지노선을 구축하는 등 엄청난 준비를 하였으나 1940. 6. 22. 독일군의 기습침공 후 불과 33일 만에 항복하고 말았으며, 히틀러(1889-1945)는 신임했던 코르티츠 중장을 파리 점령군사령관에 임명했다.

히틀러는 파리를 가 보는 것이 일생의 꿈이었다고 한다. 히틀러가 파리를 점령한 후 가장 먼저간 곳이 오페라 가르니에였다.

그러나 2차 세계대전이 길어지면서 히틀러는 미친 사람의 화신으로 변해갔다. 파리점령 4년 뒤인 19446. 6. 미국. 영국, 개나다 등 연합군 154000명의 노르망디 상륙과 함께 전세가 기울어 점령지 파리를 지탱하기 어려운 상황이 되었다. 히틀러는 코르티츠에게 파리의 모든 건물에 대한 초토화 작전을 명령한 후 발작적으로 몸을 떨면서 외쳤다.

나는 파리를 파괴하라고 명령했다. 그 명령은 집행되었는가?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적장 코르티츠 파리를 구하다

당시 나폴레옹(1769~1821)이 잠들어있는 앵발리드 기념관에는 2톤의 폭약이 장치되어 있었고, 1874년까지 세계에서 가장 높은 건물로서 무려 400년에 걸쳐 지어진 중세 종교건축의 걸작인 노틀담의 사원에는 3톤의 폭약이 점화를 기다리고 있는 등 파리의 모든 건물과 다리에 폭파준비가 완료되어 있었다

이제 코르티츠의 한마디가 떨어지면 파리는 잿더미가 될 판이었다.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상관의 명령을 어긴 일이 없었던 코르티츠였으며, 파리는 분명 적국의 수도였으나 적과 동지를 넘어서는 인류의 문화유산을 간직한 아름답고 값진 도시였다. 그는 문화와 예술의 유산을 전쟁의 이름으로 한 순간에 파괴할 수는 없었다.

코르티츠는 끝내 폭파명령을 내리지 않은 채 연합군의 포로가 되었다. 그의 깊은 역사의식과 사랑으로 파리는 무사할 수 있었다.

 

영원한 존경을 받다

독일의 바덴바덴에는 온 인류가 존경하는 디트리히폰 코르티츠 장군이 잠들어 있다. 1966년 바덴바덴에서 여생을 보내던 그가 숨지자 세계의 언론들은 진심어린 추도사로 그의 죽음을 슬퍼했다.

하지만 가장 깊은 애도를 보낸 것은 피 지배자였던 파리 시민들이었다. 그는 명령에 죽고 사는 군인으로서 주군 히틀러의 명령보다 인류의 아름답고 찬란한 문화유산을 지키는 임무를 다했던 장군이었다. 이렇듯 파리가 천하 명당에 자리했기에 기적이 일어났다는 건 필자만의 억측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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