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 함양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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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최고 명문가를 찾아서
사대부나 재력가 치고 풍수지리를 따지지 않는 집안이 없었지만 인촌가 만큼 신봉한 집안도 없었다. 전북 순창, 부안, 고창의 좋은 명당은 울산김씨가 다 차지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촌의 9대조 김창하 묘(순창군 복흥면 반월리 화개산), 증조부 김명환 묘(전북 부안군 산내면 지서리), 증조모 전의이씨 묘(순창군 쌍치면 시산리 보평 마을), 조부 김요협 묘(고창군 아산면 선운사 뒤 도솔산 옛 백련암), 조모 영일정씨 묘(고창군 아산면 반암리 호암마을) 등이 대 명당으로 이름나 있고,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의 생가도 유명한 양택 명당이다.
그러나 필자가 감정해 보니 증조부 김명환 묘는 무맥지(無脈地)인데다 높은 곳에 위치했으면서 혈장을 감싸주는 사신사(四神沙)가 없고, 강한 바닷바람에 노출되어 명당은 커녕 인촌 위의 3형제가 요사(夭死)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흉지로 보인다.
순창군에 있는 증조모 전의이씨 묘는 산세도 좋고 용(龍), 혈(穴), 사(沙), 수(水)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특히 석보리, 도고리, 시산리, 금평리를 흐르는 추령천이 ‘S’ 자로 계속 환포하는 등 재물에 크게 이로운 속발복지로 보인다.
풍수에서 ‘귀(貴)를 원하면 산세(山勢)좋은 곳에서 명당을 찾고, 부혈(富穴)은 수(水)가 좋은 곳에서 찾으라’ 는 격언이 있는데, 조부 김요협 묘는 산세가 좋아 귀(貴)에 이로운 명당이고, 증조모, 조모 묘는 수(水)가 좋은 부혈(富穴) 명당이다.
특히 호암마을에 있는 조모 영일정씨 묘도 진혈 명당(眞穴 明堂)이자 마을 앞을 흐르는 냇물은 고창읍, 무장면, 성송면, 아산면, 고수면, 북일면, 등 6개 읍, 면의 물길이 합수(合水)하여 주진천을 만들고, 호암마을 건너 오계산(154.3m) 자락이 크게 역수(물길을 가로막음) 하여 물길이 90도로 세번 회전 한 후 ‘ㄷ'를 만들면서 선운산 도립공원을 지나 서해로 흘러간다.
호암마을 인근은 반암리, 구암, 옥단 바위 등 암석을 뜻하는 지명이 많은데 이런 곳은 물길의 굽고 천천히 흐르며, 특히 마을 옆의 옥단 바위와, 병 바위는 ’마을을 이롭게(호암)‘ 해 주면서 영일 정씨 묘를 ’호남 8대 명당‘ 으로 만들었다.
◈북향의 양택(陽宅) 명당(明堂)
인촌의 생가도 양택(陽宅)에서 보기 드물게 생기가 융취 된 명당 터이고, 풍수이론(風水理論)에 맞게 동사택으로 건축했다. 일반적으로 같은 명당이라도 양택지가 음택지보다 발복이 빠른데, 그 이유는 양택 명당은 그 터에 살고 있는 후손들이 직접 명당기운을 전달받기 때문이다.
인촌 생가는 배산임수(背山臨水)를 고려한 북향 명당이다. 주산은 소요산(445m)으로서 학봉 또는 매봉이라 불리는 현무봉 아래의 중심 용맥에 생가가 위치하며, 1800년대에 구조와 형태가 같은 위, 아래채를 지었는데 윗 채는 生氣가 지나가는 과룡(過龍)상에 있고, 아래채가 명당혈처다.
인촌의 백부(棋中)는 윗 채에 살았고, 생부(暻中)는 아래채에 살았다. 야트막한 청룡과 백호가 터를 감싸주어 보국을 형성하며 북향집이지만 뒷산이 낮아 아침부터 저녁까지 햇볕이 잘 든다. 안채의 좌향은 정좌계향(丁坐癸向)으로 15도 기운 북향이다.
대문은 감방(坎方 :북), 안방은 이방(離方 : 남), 부엌은 손방(巽方 : 동남)으로 양택 삼요결에 의한 길한 방위의 배치다.
그러나 지무십전(地無十全)이라고, 완벽한 터는 없다. 이곳은 청룡 쪽이 허약하여 사랑채를 지어 비보(裨補)했다.
◈인촌가의 자손번창
인촌가는 자손이 귀했는데, 인촌 대(代)에 들어 크게 번창했다. 인촌은 당시 호남 최고 갑부 김경중과 고흥 고씨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위의 세 형은 모두 어릴 때 죽었고, 아래로 수당 김연수(1896~1979)가 있다. 큰아버지 김기중은 아들이 없자 세 살 된 인촌을 양자로 입적했다.
인촌은 아들 아홉을 두었는데 장남 상만은 동아일보 사장을 지냈고, 4남 상룡은 제 5, 6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며, 인촌의 동생인 수당 김연수는 일곱 아들을 두었으며, 상협은 교육부 장관과 국무총리를, 상흥은 삼양그룹 회장을 역임했으며 초대 대법원장인 가인 김병로는 친척이다.
인촌은 최근 ‘친일 반민족 행위자’ 로 규정, 서훈(건국훈장)이 취소되었다. 그러나 민족 사학인 보성전문학교와 고려대, 중앙고등보통학교, 한때 민족의 정론지로 평가받았던 동아일보, 국내 최초의 주식회사로서 조선인이 주식 모두를 소유하여 민족기업의 상징이자 자존심이었던 경방을 설립한 인물이다.
누구나 공(功), 과(過)가 있고, 인촌의 국가를 위한 공은 과보다 훨씬 크다. 특히 일제 강점기엔 총독부에서 요구하는 수준의 친일을 하지 않고서는 아무런 일도 할 수 없었다는 사실은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기에, 김대중 대통령도 “인촌은 친일파가 아니다” 라고 말했으나, 주사파 정권이 현재의 잣대로 평가하여 친일파로 매도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
인촌은 민주당의 모체인 한민당을 창당하고 이승만을 도와 자유대한민국 건국에 기여했으며, 1951년 2대 부통령에 선출되는 등 정치, 경제, 언론, 교육, 문화계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기면서, 울산 김씨를 대한민국 최고의 명문가 반열에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