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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남계서원의 제향 인물과 자랑거리 및 발전 방향 탐색
이번 특집은 먼저 40년 전의 개인적 일화, 입구 서원 표지석 뒷면에 새겨진 남계서원 시의 의미, 남계서원 제향 3현 관련 약술(略述), 남계서원의 자랑거리, 남계서원 활성화를 위한 제언으로 구성하고자 한다. 1980년대 초 다가올 21세기의 국가경쟁력 확보를 위해 교육혁신을 고민하던 5공 정부는 한국교원대학교를 세우고 현직 교사들을 선발하여 월급을 주면서 2년간 공부만 하도록 하는 새로운 제도를 만들었다. 필자는 운 좋게도 특별과정 1기생으로 공부할 수 있는 행운을 잡았다. 그때 교수와의 첫 만남에서 한국교육사 교수님의 첫질문이 “고향이 어딘가?”였다. 함양이라고 말씀드렸더니 첫마디가 ‘남계서원을 공부해라.’라는 말씀이셨다. 수동이 고향이고 도북국민학교를 다녔기에 남계서원은 봄 가을 단골 소풍지요 함양중학교를 다녔기에 아침 저녁 등하교길에 별다른 생각 없이 그냥 지나다니던 허름한 그 남계서원인데 21세기 국가경쟁력을 고민해 만든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특별과정 입학생에게 첫 만남에서 남계서원을 공부하라고 하신 이유를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다. 40년이 지난 지금 보니 산업화와 정보화로 초래된 인성교육의 위기를 전통적 인성 교육기관인 서원의 활용으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셨기 때문이었던 것 아닌가 생각된다.
남계서원 진입로에 들어서면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 추모비’와 ‘남계서원 표지석’이 탐방객을 먼저 맞이한다. 추모비(追慕碑)는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 서거 500주년 추모회’에서 조선조 5현의 한 분이며 동국 18현의 일원으로 문묘에 종사된 문헌공 일두 정여창 선생의 격에 맞게 크게 만들어 그 규모가 압도적이다. 하지만 남계서원의 진정한 가치를 표상하는 것은 거대한 추모비가 아니라 입구 오른쪽에 서 있는 자그마한 남계서원 표지석(標識石)이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표지석 뒷면에 새겨진 한 수의 남계서원 시가 남계서원의 의미와 가치를 가장 확실히 말해 주기 때문이다.
최초로 세워진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에서 서원의 존재 의의와 가치를 확인하고 나라에 사액(賜額)과 서원의 설립과 지원을 청하여 사액서원(賜額書院)의 새로운 시대를 열었으며 이산서원(伊山書院)의 원규(院規)를 제정하여 우리나라 서원 교육의 내용과 운영을 위한 제도적 기틀을 만듦으로써 서원의 설립과 성장에 가장 큰 역할을 했던 선현이 바로 퇴계 이황 선생이다. 퇴계 선생은 65세 때인 1565년 2월에 그 당시에 세워져 있던 아홉 개의 서원에 대해 한 수씩의 시를 짓고 총론 시를 한 수 더 지었는데 이 시가 바로 퇴계 선생의 서원십영[書院十詠]이다. 서원십영에서 노래한 아홉 개의 서원은 풍기의 소수서원(紹修書院), 함양의 남계서원(灆溪書院), 영천의 임고서원(臨皐書院), 해주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성주의 영봉서원(迎鳳書院), 강릉의 구산서원(丘山書院), 영주의 이산서원(伊山書院), 경주의 서악서원(西嶽書院), 대구의 화암서원(花巖書院)으로 우리나라 서원사에서 가장 초기에 세워진 서원을 망라되어 있다. 이 시에 나오는 9개 서원 중 2019년 세계유산으로 등재된 곳은 소수서원과 남계서원 두 곳뿐이니 남계서원 표지석 뒷면에 새겨진 이 남계서원 시 한 수의 의미를 제대로 안다면 남계서원 탐방의 가치와 의미는 증대될 것이다.
堂堂天嶺鄭公鄕(당당천령정공향) 당당한 천령고을은 일두 정 선생의 고향이라 百世風傳永慕芳(백세풍전영모방) 백세토록 전해질 선생의 기풍을 영원히 사모하여 廟院尊崇眞不忝(묘원존숭진불첨) 사묘와 서원을 지어 존숭함은 정녕 욕되지 않도다 豈無豪傑應文王(기무호걸응문왕) 일두 선생은 주나라 문왕에 필적할 만한 호걸일지니.
퇴계 선생은 서원십영 속 남계서원 시에서 일두 정여창 선생을 문화·도덕·예를 바탕으로 나라를 안정시키고 주나라의 번영을 이룩한 성군(聖君) 주나라 문왕(文王)에 응할 만한 호걸로 칭송하고 있다. 유가(儒家)에서는 문왕을 중국 역사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의 한 사람으로 칭송하고 있는데 퇴계 선생께서는 일두 선생을 바로 그런 문왕에 비교할 만한 호걸로 평가하시고 남계서원을 세워 존숭하는 것이 진정 욕되지 않다고 했으니 남계서원은 모셔진 선현 일두 선생의 존재만으로도 자랑스러운 서원이다.
일두 선생은 조선조 도학의 종장으로 추숭된 선현으로 조선조 5현, 동방 18현의 한 사람으로 문묘에 배향된 어른이나 선생의 생애와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선생의 저술들이 사화의 광풍 속에 모두 불태워지거나 전화로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지금 전하는 선생의 사상적 편린이나 업적은 다른 사람들의 평가나 저술 속에 남겨진 일부를 통해서 유추할 수 있을 뿐이다. 일두 선생은 세종 말년인 1450년 5월 5일 단오날 함양군 지곡면 덕곡리 개평에서 태어났으며, 18세였던 1467년 세조 13년 아버지 정육을(鄭六乙) 공이 함길도에서 일어난 이시애(李施愛)의 난(亂)을 토벌하던 중 전사하자 이천리 길을 달려가 시신을 찾고 고향으로 모셔 와 반장(返葬)한 일과 홀로 남은 어머니 최씨부인을 지극정성으로 모신 천하의 효자로 소문이 났다. 하지만 일두 선생은 스스로 효자라고 말하지 않았으며 아버지의 전사를 자신의 출세를 위한 기회로 이용하지 않았다. 이시애의 난 평정 과정에서 전사한 아버지의 상(喪)이 끝나자 임금은 부친의 공로를 가상히 여겨 아들인 일두 선생께 관직을 내리도록 명하였으나 선생은 아버지의 패전을 기화로 하여 자식이 영예롭게 되는 것은 차마 못 할 짓이라며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지난 9월 함양문화예술회관에서 열린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 6주년 기념학술발표대회에서 성균관대학교 이주강 교수는 “일두 선생은 자신을 효자라고 자처하지 않았으며, 효자가 아닌 자신이 효행천거(孝行薦擧)로 관직에 나간다면 실제와 명분이 어긋난다면서천거에 의한 임용을 사양했다. 일두 선생은 효를 정명(正名)으로 이해했을 뿐 결코 수단으로 이해하지 않았다.”면서 최근에 대학 입학전형에서 효행 특별전형을 실시하고 거기에 편승해 대학에 가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효행을 수단으로 생각하고 이용하는 바람직 하지 못한 제도요 행태라고 비판했다. 일두 선생의 효행에 대한 현재적 의미 확인이요 평가라고 생각된다.
남계서원 사당에는 주벽 일두 선생 좌우에 개암 강익 선생과 동계 정온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개암 선생은 바로 남계서원 창건을 주도한 선현으로 퇴계 선생의 큰아들과 동갑인 1523년생이었다. 나이는 퇴계 선생의 아들 연배였지만 퇴계 선생께서 토계 옆에 서당을 짓고 제자들을 처음 가르치기 시작한 바로 그해에 스물아홉 살의 백면서생으로서 남계서원 창건이라는 대역사를 주도하고성취했다.이를 통해 개암 선생은 500년 가까운 세월이 흐른 지금 우리 함양인들이 세계문화유산 남계서원을 가질 수 있게 만들었다. 개암 선생의 행장(行狀)에 “... 임자년에 선생이 일두 문헌공을 위하여 서원을 창건하려 하였다. 당시 우리 동방의 서원으로는 죽계서원(竹溪書院=백운동서원) 밖에 없었기에 견문이 미숙하고 다른 의견이 분분하였으나 선생은 의연히 흔들림 없이 일을 시작하기로 뜻을 정하고····10년 만에 일을 마쳤다.”고 기술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남계서원 창건 과정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퇴계 선생이 백운동서원의 사액을 청한 글에 ‘주후[周侯, 풍기군수 주세붕(周世鵬)]가 비로소 서원을 창건하자 세속에서 자못 의심하고 괴이하게 여겼으나, 주후의 뜻은 더욱 독실하여 사람들의 비웃음을 무릅쓰고 비방을 물리치면서 이 전례에 없던 훌륭한 일을 단행하였습니다.’고 기술한 바와 일맥 상통하는 내용으로 초창기 서원 설립에 상당한 비판과 반대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신재 주세붕 선생이나 개암 강익 선생의 서원 창건을 위한 굳은 의지와 추진력이 새로운 역사가 만들어진 셈이다.
남계서원에 모셔진 동계(桐溪) 정온(鄭蘊) 선생은 이웃 안음현 사람이다. 광해군 때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게 한 강화부사 정항(鄭沆)을 참수하고 영창대군의 위호(位號)를 추복(追復)하여 예장(禮葬)할 것을 청하고 폐모론(廢母論)을 발의한 이들을 성토하는 글을 올렸다가 광해군(光海君)의 미움을 사 제주도에 유배되고 10년간 귀양살이를 했다. 인조반정으로 복권되어 형조참판, 도승지, 대사헌 등을 지내고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났을 때 인조를 호종(扈從)하고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화의(和議)를 주장하는 최명길(崔鳴吉)의 주장을 배척하고 끝까지 항전할 것을 주장하다가 조정 중론이 항복으로 결정되자 자결을 시도했으며 죽지 않고 구명되자 수승대가 있는 안음현의 원학동 모리(某里)로 들어와 은거했던 절의지사(節義志士)였다. 제주도에는 오현고등학교(五賢高等學校)라는 명문 사립고등학교가 있는데 제주목사를 지내거나 제주도로 유배를 와서 제주도의 문풍을 크게 일으킨 다섯 분의 현인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명문사학이다. 이 오현고등학교에서 기리는 다섯 분 중의 한 사람이 바로 동계 정온 선생이다. 동계 선생은 1677년 남계서원에 배향되어 오늘날까지 제향되고 있다.
남계서원은 세계유산으로 지정된 9개 서원 가운데서도 다음과 같은 점을 특별히 자랑거리로 내세우고 있으니 우리 함양인들은 이점을 알고 함양을 방문하는 외지인들에게 남계서원의 가치와 의미를 홍보해 주면 좋겠다. 첫째, 유네스코 세계유산목록에 등재된 세계유산이다. 둘째, 현존하는 한국의 수백 개 서원 중에서 두 번째 세워진 서원이다. 셋째, 전학후묘(前學後廟) 서원 배치 양식의 모델이 된 서원이다. 넷째, 지역 유림이 공론을 모아 세운 최초의 서원이다. 다섯째, 조선조 선현을 모신 최초의 서원이다. 여섯째, 함양의 한지를 이용해 많은 서적을 출간한 지식산출의 보고였다.
한국의 서원 세계유산 등재 6주년 기념 9개 서원 탐방 특집을 마치면서 남계서원의 현재적 의미와 발전 방안을 제언한다. 서원은 제향을 통한 존현(尊賢), 강학을 통한 양사(養士), 교유(交遊)와 유식(遊息)을 통한 향풍(鄕風) 진작(振作)이 주된 임무요 역할이므로 춘추향사 제향을 사전 습의(習儀)나 제유사 교육을 통하여 보다 체계 있게 시행할 것, 교육청과의 연계를 통하여 초중고학생들의 인성교육 활동을 확대하고, 군청등 관계기관들과 연계하여 기관 구성원들의 청렴교육이나 인성교육, 향토애 교육 등에 활용할 수 있도록 할 것, 정례적 교유, 유식 활동을 통하여 우리 지역의 향풍을 순화하는 센터로 활성화할 것 요구된다. 남계서원은 세계유산 등재로 국가나 지방자치단체가 재정적 지원과 정책적 배려를 통하여 보호 보존하고 적극적으로 활용해 나가야 할 책무가 주어졌으며 일반인들의 관심도 증폭되었으니 물 들어올 때 배를 띄우라고 이렇게 분위가 조성되고 에너지가 넘쳐날 때 남계서원 전체 구성원들은 서원을 활성화시켜야만 한다. 최근 60억 가까운 돈을 들여 교육관을 짓고 200억 가까운 거금을 들여 한옥 호텔 등을 짓는다고 하는데 사업을 시행하는 군청이나 관계공무원들은 남계서원을 중심으로 조성되는 서원 관련 시설이나 연계 시설의 경우 건설 및 활용 방안 기획과정에 반드시 제일 먼저 서원 관계자들과 지역 유림의 의견을 경청하고 반영해야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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