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중엄(范仲淹:989~1052)은 중국 송나라 때 병법을 추진한 정치가이자 서북 변방을 지킨 군사 전략가이다. 「천하의 걱정을 먼저 한 다음 내 걱정을 하고, 천하가 즐거워진 다음 나도 즐거워 할 것이다(先天下之憂而憂,後天下之樂而樂).」라는 만고의 명문장〈악양루기(岳陽樓記)〉를 남겼다. 이 구절은 송나라가 거란과 대치하는 어려운 상황에서 범중엄이 친구의 초청으로 중국의 3대 정자 중 하나인 악양루에 올라서 남긴 시 인데 송나라가 이때 명운을 예측할 수 없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을 때 개인의 이익보다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우선할 것을 언급한 것이다. 이 시는 중국 정신의 일부가 되어 중국 문명의 찬란히 빛나는 보배와 같은 정신유산으로 남아 있다는 평을 듣는다. 이 때문에 송나라 때의 대학자 주희(朱熹:1130~1200)는 범중엄을 「유사 이래 천하 최고의 일류급 인물」이라고 칭찬한 바 있다. 그는 중국을 대표하는 우국충정(憂國衷情)의 전형적인 명재상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는 권력에 아부하지 않았으며 직언으로 세 번이나 귀양을 가면서도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고 나라와 백성을 살리려 하였고 52세 나이에도 출정하여 군대의 상황을 시찰하고 폐단을 시정함으로써 뛰어난 공을 인정받아 54세 때인 1043년 추밀부사(樞密副使)로 승진했다가 같은 해 재상으로 발탁되었다. 국정을 주도하게 된 범중엄은 조정 내의 각종 폐단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방만한 관료 조직, 수많은 군대, 지나치게 지출이 많은 재정 등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님을 간파하고 왕인 인종에게 10개 항의 혁신안‘경력신정(慶歷新政)’을 제기했다.
첫째 명출척(明黜陟):승진과 강등을 분명히 하자는 것으로 관리 승진제도의 개혁을 주장함. 둘째 억요행(抑僥倖):요행을 없애자는 것으로 관료 자제의 특권을 엄격하게 제한함. 셋째 정공거(精貢擧):인재를 선발하는 과거제도를 제대로 다듬는다. 넷째 택장관(擇長官):덕과 재능에 따라 지방 장관을 선발한다. 다섯째 균공전(均公田):관전(官田) 분배의 불공정 문제를 해결한다. 여섯째 후농상(厚農桑):농업생산을 중시한다. 일곱째 수무비(修武備):수도의 방위와 경비를 강화한다. 여덟째 감요역(減徭役):백성들이 지는 노동의 부담을 줄인다. 아홉째 추은신(推恩信):백성을 위한 정책을 충실하게 집행한다. 열째 중명령(重命令):조정의 규율을 엄격하게 하고 멋대로 고치지 않는다.
인종 임금은 범중엄의 혁신안을 크게 칭찬하며 그해 10월 바로 조서(詔書)를 내려 전국에 고시했다. 이것이 바로 역사상 유명한 개혁정치인‘경력신정(慶歷新政)’이다. 신정은 부패한 관리를 축출하고 부실한 재정을 개선하기 위한 하나의 계기가 되었다. 백성들의 생활은 나아졌으나 기득권 세력과 관료들은 극렬하게 저항했다. 개혁의 강도가 세면 셀수록 저항의 정도도 강했다. 기득권 세력들은 평소 때는 서로를 비판하고 공격하다가도 개혁이 닥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나로 뭉친다. ‘혀는 쇠도 녹인다’는 말처럼 쉴 새 없는 범중엄에 대한 비방과 중상은 결국 인종의 마음을 흔들어 놓았다. 개혁이 시작된 지 3년 만에 인종은 범중엄을 자리에서 끌어냈고,‘경력신정’은 사산(死産)되고 말았다. 그가 개혁정치를 시도한 뿌리에는‘먹고 입는 것은 간략한 것에 만족하되 공부는 만족을 몰라야 한다.’는 가훈이었다고 생각된다. 그는 후손들에게 「절대 부귀를 탐내지 말 것이며 자신의 인품과 덕을 손상시키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현재 14억 중국을 이끌고 있는 시진핑 국가 주석은 범중엄의 이 구절을 종종 인용하여 젊은 학생들에게 인생의 이상적 목표와 정치적 포부로 삼으라고 권하고 있다. 그는 생을 마감하면서 임금에게 다음과 같은 교훈적인 유언을 남겼다.「개인의 사사로운 욕망에 얽매이시지 말고 상벌을 분명히 하면서도 신중하게 처리하실 것이며 유능하고 어진 인재들을 존중하고 요행을 바라지 마시옵소서!」 범중엄같은 신하가 그리워지는 현실이다.
『논어』에서는「군자는 의로움(義)에서 깨치고, 소인은 이익(利)에서 깨친다.」라고 했다. 사람이 멀리 내다보는 생각이 없으면 반드시 가까운데 근심이 있다는 말도 있다. 이때 멀리 내다본다는 것은 국가와 공적인 차원을 뜻한다. 국가의 명운보다 눈앞의 이익에 영혼을 빼앗긴 정치인은 모두 소인배다. 이제 소모적인 정쟁 같은 것들은 좀 뒤로하고 선량들께서는 경력신정을 교훈으로 삼아 나라를 잘 이끌어 주었으면 한다.
전경익
전 경상국립대학교 토목공학과 겸임교수·함양중학교 1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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