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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손으로 세상 뜬 당대 최고 부자,‘이석영’
항일투쟁에서 우뚝한 이회영·이시영 여섯 형제의 강력한 뒷배, 독립운동가 이석영을 기억한다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1/08/02 [10:13]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후손이 끊겼다고 알려진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1855~1934, 이하 호칭 생략)의 직계 후손이 여러 명 생존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석영은 17세기 조선의 문신 백사 이항복의 후손으로, 이후 내내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이자 걸출한 독립운동가 집안인 ‘경주 이씨 6형제’ 중 둘째다. 일본이 조선을 강제 병합한 해가 저물어가던 1910년 12월30일 새벽, 건영·석영·철영·회영·시영·호영 여섯 형제는 집안의 재산을 전부 처분한 거금을 챙겨 가족 40여 명과 함께 비밀리에 중국으로 망명한 뒤 일생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일제강점기 항일무장투쟁의 요람이던 신흥무관학교(1911~1920)도 이석영 형제들이 세우고 운영했다. 신흥무관학교는 강제 폐교되기 전까지 3500여 명의 독립군 지휘관과 전사들을 길러냈다. 해방과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는 여섯 형제 모두와 이회영의 부인 이은숙, 그리고 일부 형제의 자녀와 사위까지 17명이 건국훈장을 받았다.

 
<한겨레21>은 2021년 6월18일부터 최근까지 한 달에 걸쳐 이석영의 증손녀 김용애(86), 최광희(82)와 김용애의 아들 김창희, 이회영의 손자인 이종찬(85) 우당 이회영선생 교육문화재단 이사장(전 국가정보원장) 등을 인터뷰하고 관련 사진과 호적 자료 등을 열람했다. 이종찬은 석영·회영 집안의 추모·기념 사업을 도맡아온, 생존 후손 중 맨 웃어른이다.

 
짧게 잡아도 해방 전후인 1945년쯤, 더 위로는 거의 1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옛일에 대한 이들의 기억 일부는 헷갈리고 불분명한 부분도 있었지만, 대부분 매우 생생하고 구체적이며 일관됐다. 이종찬은 7월20일 김용애·최광희와 만나 옛 기억과 집안 어른들에게 들은 이야기를 서로 맞춰보고 사진 자료를 검증한 뒤 이들이 이석영의 혈육이자 자신의 5촌 조카(당질)라는 사실을 확인했다._편집자주

 

역사 속에서 우리 공동체의 위기를 직시하고 난관을 뚫어낸 자랑스럽고 영웅적인 선각자들을 기억하고 선양하는 것은 오늘의 우리를 굳세게 한다. 그들이 있어 우리가 있다.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은 나를 가다듬고 곧추세우는 죽비다. 이런 질문을 함께 공유할 때 우리 미래는 더욱 굳건해진다. 나를 돌아보게 하고 우리를 견실하게 이끄는 이, 독립운동가 이석영 선생(이하 호칭 생략)이 그런 분이다.

 

서울까지 남의 땅 안 밟는 대감댁 양자로

 

1855년 철종 6년, 후일 고종 대에 이조판서에 이른 부친 이유승의 둘째 아들로 세상에 났다. 경주 이씨 명문가 이항복의 후손이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다. 다섯 남동생이 뒤를 이었고, 막내가 어린 시절 세상을 떠 ‘여섯 형제’가 반듯하게 자랐다. 그중 이석영은 “이웃들 사이에서 ‘잘생기고 반듯해서 탐나는 아들’ 소리를 들었다” 한다.

 

1885년, 이석영의 나이 서른한 살 때 그의 생애에 큰 전기가 되는 일이 있었다. 영의정을 지냈고 고종의 강력한 정치적 후견인이던 같은 집안 이유원 대감의 양자로 들게 된 것이다. 이유원은 당대 조선 최고 부자 중 한 사람이었는데, 기록에 따르면 ‘임금이 있는 한양에서 사는 곳 양주(현재 경기도 남양주)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오르내렸다’고 한다. 그런 이유원 대감이 노년에 이르러 관직에서 물러섰을 때 하나뿐이던 아들을 잃었다. 그래서 양자를 들였는데, 그가 이석영이다. 유일한 적자 후손으로 이유원 대감을 모시던 이석영의 자취는 남양주 보광사 인근 여러 유적지에서 만나볼 수 있다.

 

이석영은 이유원의 양자에 든 그해에 과거시험에 합격해 구한말의 관료가 됐다. <승정원일기>를 기록하는 가주서를 시작으로 20여 년 동안 선전관, 이조참의, 동부승지, 형조참의, 좌부승지, 우부승지, 승지 등의 직책을 이어 맡았다. 갑오년의 난리와 청일전쟁, 대한제국 선포, 아관파천, 독립협회 운동, 이웃 일본의 노골화하는 침탈 등 우리가 아는 근대 격랑기에, 그는 요즘으로 치면 청와대 비서실에서 출발해 여러 부처의 직책을 잇다가 다시 청와대 비서관 직위에 오른 셈이다. 그러다가 국운이 흔들리던 때 1904년 장예원소경을 끝으로 더는 관직에 나서지 않았다. 그나마 그에게는 양부 이유원이 남긴 엄청난 가산이 있었다. 서울, 파주, 남양주, 충주 등에 여러 가옥과 전답을 소유해 당대에 손꼽히는 재산가였다.

 

여섯 형제 가족이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관직에서 물러선 뒤 그의 관심은 근대 산업을 일구는 일과 육영사업이었다. 개화운동에 열심인 동생 이회영, 이시영을 돕고 거두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일제 강점 직전 가장 큰 운동단체라 할 수 있을 신민회 활동에 대한 관심과 참여도 뚜렷했다. 두 동생 이회영과 이시영이 앞장서 참여했고, 이후 이석영과 형제들의 행보가 신민회의 구상과 같다.

 

신민회 선각자들은 망국의 상황에서 ①국민교육 장려보급으로 국민의 각성을 촉구할 것 ②넓게 우국지사들을 연결해 비밀조직을 만들고 그 조직으로써 광복운동의 중추로 삼을 것 ③만주에 광복군 양성훈련 기지를 만들 것 ④운동의 혈맥인 재정을 준비할 것(<만주 망명 100년과 그 역사적 의의>, 이문창, 2010, 재인용) 등을 당대 과제로 삼았는데, 이 일에 자신의 자산과 남은 삶을 바쳐 진력한 사람이 이석영이다.

 

섬기던 나라가 국권을 빼앗겼다. 재산이 있고 배운 게 있는 대다수 사람이 고개를 숙이고 일제의 통치에 순응하며 일신의 안락을 돌볼 때, 여섯 형제는 압록강을 넘어 만주로 향하기로 뜻을 모은다. 무엇보다 이석영의 재산이 큰 뜻을 세우는 강력한 뒷배였다. 그의 재산이 없었다면 아마 달랐을 것이다. 당시 그가 처분한 재산이 요즘으로 환산하면 적게는 수천억원, 많게는 2조원 넘는 규모라고 한다. 여섯 형제의 가족이 감시의 눈을 피해 장도에 나서고 압록강을 넘어 만주에 이르는 도정은 상상만으로도 장엄하다.

 

아나키스트 이회영, 이승만에 맞선 이시영

 

그렇게 서간도 삼원보에 터를 잡고 1910년대 독립운동의 우뚝한 성취로 기록된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가 양성 사업에 나선다. 석주 이상룡, 이동녕, 김동삼, 김대락 등 비슷한 이력의 항일운동가들이 함께 한 일이다. 그는 신흥무관학교를 비롯해 서간도 지역에 정착하는 조선인 자녀들의 육영 사업을 담당하는 여러 학교 건립과 운영에 가지고 온 재산 대부분을 쏟아부었다. 당연히 조선 갑부의 재산이 눈이 녹듯 스러졌다. 3·1운동 직전 서간도 지역 일제 밀정의 보고는 ‘이가(李家) 일족이 만주에 있는 조선인의 우두머리가 되는 것을 꿈꿔 교육사업, 혹은 배일(背日)사업, 혹은 뜻있는 사람을 돕는 일 등에 적지 않은 금전을 투자했으나 뜻과 달리 이제 궁핍한 형편이 되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고도 이석영은 항일운동을 돕는 일을 그치지 않았고, 일흔아홉 살 죽음에 이르도록 독립운동가들의 곁을 떠나지 않고 대열을 지켰다. 3·1운동 이후에는 두 아들이 차례로 뒤를 이어 독립운동에 나섰으나 모두 비명횡사했다. 봉천, 천진, 북경, 상해를 떠돌던 노년의 이석영 부부는 가난했다. 끼니를 걱정해야 했고, 두부공장에서 비지를 구해 먹으며 연명하기도 했다. 그러했음에도 그의 죽음에 대해 김구 선생이 이끈 조직인 한민당의 당보가 ‘여러 대에 걸쳐 큰 벼슬을 잇던 거족으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가 망국의 한을 품고 고국을 떠나 이역에 와서 재산 전부를 없이 하고 나중에는 지극히 곤궁한 생활을 하면서도 일호의 원성이나 후회의 기색이 없고 태연하여 장자의 풍이 있었을 뿐’이라고 추도했듯이, 자신 뜻대로 할 바를 다한 그는 자신의 처지를 오롯이 감당했다. 일찍이 월남 이상재 선생은 “해방되면 우당(동생 이회영의 호) 형제들의 재산은 나라에서 다 돌려줘야 한다”고 했다 한다. 돌려받을 재산 대부분은 이석영 그의 것이다.

 

그의 ‘여섯 형제’ 서사는 꽤 많이 알려져 있다. 특히 넷째 이회영 선생의 투쟁기는 그의 부인 이은숙, 아들 이규창, 그리고 걸출한 정치인으로 활동했고 활동하고 있는 손자들 이종찬, 이종걸 등의 기록과 기억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1920년대 우리 독립운동의 한 흐름이었던 무정부주의 운동을 이끈 발자취, 무엇보다 노구를 이끌고 항일 무력투쟁을 위해 만주로 향하다가 피검 옥사한 비극적인 죽음으로 하여, 영웅적인 일대기로 회자된다.

 

다섯째 이시영 선생의 족적 역시 우뚝하다. 형제들과 함께 압록강을 건너 36년 내내 항일투쟁 일선을 지켰고, 3·1운동 이후 설립된 임시정부의 주요 직책을 맡아 일하다가 여섯 형제 중 홀로 생환했다.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으로 건국의 주역이고, 전란 중 민주주의를 훼절하는 이승만에게 맞선 진영의 지도자로 활약했고 2대 대통령 선거에서 그와 겨뤘다. 독립운동과 한국 현대정치의 한 거목이고, 북한산 자락 수유리에 묘역이 있어 오가는 이에게 옷깃을 여미게 한다. 이런 동생들에 비해 여섯 형제 만주행의 결정적인 동력이었고 형제들 항일운동의 뒷배였던 이석영의 발자취에 대한 기록, 기억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동안 알려진바 절손됐다고, 아들들이 죽고 그를 증언할 자손을 남기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근왕주의자, 공화주의자, 구한말 혁신가

 

과거에 대한 탐구는 우선 ‘그때 그 자리’를 새기는 것이다. 재산을 내놓아 후학을 육성하고 항일 대열을 꾸리고자 나선 행보는 얼마나 장엄하고 위대한가. 남은 재산의 크고 작음에 연연하지 않는 삶의 태도는 얼마나 의연하고 큰가. 근왕주의자로 출발해서 공화주의자로, 나아가 평등한 사회를 꿈꾸기까지 자신을 밀고 간 구한말 혁신가의 한 전형이기도 하다. 남긴 자취, 혁혁한 공로, 헌신은 형제들 누구보다, 여느 독립운동가의 그것보다 작지 않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함께 새길 일이다. 이석영의 그런 헌신의 자양분 위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서 있노라고. 그리고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새로운 한-일 관계의 주체, 지구촌 새로운 주역으로 나설 대한민국의 내일이 그 뜻을 좇아 펼쳐질 것이라고... (자료 : 한겨레 21)

▲  1911년 설립된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학생들이 농사를 짓고 있다. 우당기념관 제공   ©함양신문

 

▲  이석영, 이회영 6형제 일가의 중국 망명길을 상상해 백범영이 2017년 수묵담채로 그린 <빙천 한설리 두당 일가권속 구국망명>, (사) 우당이회영선생기념사업회   ©함양신문

 

▲   이석영 선생 초상화 <남양주시 제공>  ©함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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