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향살이 몇 해였나? 손꼽아 세어 보니 정든 고향 뒤로 하고 떠나온 지 56년 세월. 등에 업고 나온 2살 어린 아들이 초등학교 1학년, 3학년의 손자손녀를 둔 할아버지가 되었고, 내 나이는 80을 지나 섰다. 산전수전 겪고 살다 보니 백발의 노인으로 변하여도 어머니의 품속과 같은 저 남쪽 그리움의 추억으로 가슴앓이 하는 고향 함양이다.
‘낙동강 굽이치는 태백산줄기 옛 가야 선 나라 유서 깊은 내 고장’ 60년 전의 <경남도민가> 가사 내용이다. ‘지리산 굳은 줄기 동으로 뻗어내려 명산대천 간곳마다 승지 이루고 이천년 역사 속에 풍속도 순후할사’ <함양군민가> 중. 양반의 고장, 선비의 고장, 충효의 고장, 의리의 고장 함양이다. <도민가>나 <군민가>는 군 입대 전이나 제대 후 객지에 나와서도 답답하고 힘들 때 부르고 또 부르고 하던 애창가다.
웅장한 백운산 정기 받아 국회의원(2대 박정규, 5대 정준현)과 한국전쟁의 영웅(백남권)이 탄생한 백전. 모두가 한 가족으로 네 집 내 집, 네 일 내 집일 구분 없이 한 가정처럼 오순도순 지내던 110여 호 가구의 동백마을. 행복도 불행도 이웃과 함께하던 60년 전 그때 그 시절. 그곳이 참 목이 메도록 그립다. 나보다 이웃을 배려하는 마음으로 복(福)을 찾고, 어른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사랑하며, 덕(德)을 쌓았던 곳이 내가 태어나고 자랐던 자랑스러운 그곳이다.
버스에서 내려 마을로 들어오는 200여 미터의 길을 따라 마을 친구들과 양쪽에 심었던 코스모스가 피고 지고를 오랜 세월 반복을 하더니 이제는 볼 수조차 없게 되었다. 그뿐이 아니다. 물동이 머리에 이고, 소쿠리 옆에 끼고 치맛자락 펄럭이며 오고가던 마을 입구의 공동우물 이곳저곳도 모두 없어지고, 집집마다 마당과 주방에 수도꼭지의 편의시설로 변해 버렸다.
110여 호 가구에 1,000명에 달하던 마을 주민. 단합이 잘 되기로 인정을 받았던 내 고향 동백마을. 당시의 어른들은 고인이 되고, 한 동네 열한 명이던 동갑 친구들도 가시나들은 시집가고, 무슨 일이 그리도 바쁜지 저세상 가고, 이리저리 살길 찾아 떠나가고, 지금은 70여 가구 중 빈집도 있다고 한다. 70명의 마을 주민 중 10명 가까이 요양원에 계신다고 하며, 고향마을 지키는 친구랑 달랑 한 사람, 네나 내나 죽는 날까지 건강하길 바랄 뿐이다.
버들피리 불고, 도랑에서 가재 잡고, 골목길에서 동네 가시나와 마주치면 말없이 서로 방긋 웃음으로 인사를 주고받고, 눈 내리는 겨울이면 친구들과 사랑방에 모여 윗동네 새재마을 닭서리 하던 그 추억의 사연들. 백전의 향수(鄕愁)는 어딜 가도 그곳만 한 곳이 없는 풍요로운 인심. 하늘 아래서는 백전이 제일이다. 날이 가물어 개천이 메말라도 백전인들의 정은 넘쳐흘렀다.
마을의 우물물을 퍼내고 또 퍼내도 솟고 또 솟고 하듯이 그리운 고향생각. 아무리 퍼내도 솟고 또 솟아 이제는 자식 손자 눈치 보며 그리워하는 이 마음 모든 인간이 가지는 본능일까?
동해 바다의 물과 같이 더도 덜도 없이 변함없는 그리움이 고향 백전이요 동백이다. 여름이면 아들딸네 온 가족과 회사 직원들을 데리고 근 20년 동안 하계휴가를 보낸 곳이기도 하다.
매년 8월이면 빠짐없이 다니는 총동창회나 4월과 11월에 모이는 백전초 33회 동기생 모임. 가고 또 가도 올 때는 무언가는 두고 온 것처럼 아쉬움이 남는 고향. 아마도 어머니가 논에서 모를 심다 잠시 나와 젖먹이다 다시 논으로 들어가야 하는 그때의 내 어린 마음이 이러했을까?
고향이란 아무리 세상이 변하여도 한결같은 한마음이련만 어느 선배와 가까운 친구가 말하기를 수년 전부터 고향이 많이 변질되었으니 참고하라는 충고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야박한 세상으로 변하는 시대를 원망해야 할까?
내 고향 백전, 어머니 품속과 같은 따뜻한 곳이련만 지금은 찬바람에 서리가 내리고 있다는 말이 나 자신의 실감으로 마음고생도 하고 있다.
재내·외 백전인들이여! 우리 모두는 하나의 백전인이다. 선후배 간 존경과 사랑을 나누며 위대한 백전인이 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