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희식(출향작가. ‘똥꽃’ 저자) © 함양신문
|
“제 사진 좀 내려 주실래요?”
어느 여성 회원이 말했다. 단체 카톡방이었다. 온라인 화상 회의 방의 이미지를 갈무리해서 카페에 올린 내 친구는 내게 개인 톡을 보내왔다. “쟤. 엄청 예민하네. 온라인 모임에 참석해 놓고는 그 이미지는 왜 내리라는 거야?”라고. 근데 뭘 모르는 소리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너. 줌으로 화상 회의할 때 화면 갈무리해도 되냐고 사람들에게 물어봤어?” 내 친구는 아니라고 말했다. 내심으로는 그런 걸 뭘 물어보냐는 투다. 그러니 자기 마음대로 화면을 갈무리해서 역시 자기 마음대로 카페에 올렸겠지. 이제 곧 있으면 법적으로나 행정적으로 공식적인 노인이 되는 내 친구.
어떻게 말을 해야 기분 상하지 않게 말을 할까. 너 화장실 들어갈 때 노크해? 하고 물을까. 아니면 남의 집 방문할 때 미리 얘기하고 가니 그냥 막 가니? 라고 물을까. 친구는 당연하다고 했다. 노크 안 하고 화장실 문 잡아당기는 놈이 어디 있겠냐고 했다.
그래서 한 걸음 더 들어갔다. “너 요즘 티브이 보면 뉴스에 나오는 길거리 사람들 죄다 얼굴이 모자이크 처리되어 나오는 거 알지?” 친구는 긴가민가 싶은지 고개를 갸우뚱한다. 뭐든 마음에 두고 보지 않으면 기억장치에 저장되지 않는 법이다.
아무리 공적 용도라 해도 참석자 이름과 얼굴이 꼭 필요한 게 아니면 모자이크 처리를 하고 당사자에게 동의를 얻어 첨부하는 게 요즘 상식이다. 신종 예의다. 그 사람의 현재위치나 얼굴. 전화번호, 주소, 주민등록번호 등 신상정보가 디지털 사회에서는 중요한 기본권으로 떠올랐기에 그렇다.
기본권? 시대 변천에 따라 기본권 개념이 많이 달라졌다. 기본권이라고 했을 때 양심의 자유, 거주이전의 자유, 언론출판의 자유만을 아직도 되뇐다면 진짜 꼰대다. 환경권, 조망권, 초상권, 일조권, 프라이버시권 정도는 떠올려야 2022년 한국 사회에 살 시민권을 획득할 수 있다. 여기에 키, 몸무게, 부모가 생존해 계시는지 등 신상정보에 대한 물음은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묻지 않는 게 양식 있는 시민권자라 하겠다.
곧 설날이 다가오는데 오랜만에 고향을 찾은 젊은이들에게 결혼했냐느니 애는 있냐느니 묻는 것 자체가 결례라고 여겨야 한다. 왜냐고? 나이가 차면 당연히 결혼하고 결혼하면 애를 가져야 한다는 생각 자체가 시대 흐름에도 맞지 않고 비상식이 된 것이다.
몇 년 전에 동창회에 갔을 때다. 뜻밖에 **과목을 가르쳤던 선생님도 나오셨다. 그 당시 다른 선생님과 교내 결혼을 한 선생님이다. 워낙 떠들썩했던지라 그 생각이 먼저 떠올라서 “선생님. ## 선생님도 잘 계시죠?”라고 어느 동기생이 물었다. 선생님은 약간 난처해하면서 답을 피하셨다.
이혼하셨기 때문이다. 공개석상에서 함부로 아내나 남편 안부 묻지 마시라고 하면 허 참. 무슨 얘길 못 하겠네. 깡그리 조심조심.. 무슨 지뢰밭도 아니고 또 더 조심할 게 있냐고 묻고 싶을 것이다.
있다! 얼마든지 있다. 동의 없이 카톡 단체방이나 밴드에 초대하는 것도 요즘은 결례다. 초연결사회, 과잉 접속 현실이라 그렇다. 예고 없이 전화 거는 것도 그렇다.
얼마 전에 국민의 힘 대통령 후보 윤석열 씨가 안내견을 손으로 만지기도 하고 장애인단체 관계자들을 만난 자리에서 ‘정상인’이 어쩌고 라는 표현을 썼다. 해서는 안 되는 행동과 말을 한 것이다. 안내견은 절대 만지면 안 되고 정상인이라는 말 대신 비장애인이라는 말을 해야 하는 게 신종 상식이다.
카톡에 함부로 사진 올리는 것도 개인정보, 신상정보에 대한 자기 결정권(자신의 의지와 판단에 따라 얼굴, 병력, 주민번호. 특정 시간, 전화번호, 위치 등을 알리고 말고를 스스로 결정한다)을 침해하는 게 된다. 요즘 많이 사람 입에 오르내리게 된 '성 인지 감수성'이라는 말에 빗대자면, ‘신상정보인지 감수성'이라고 하겠다.
제초제를 안 치는 ’생태인지 감수성‘. 애완동물이 아니라 반려동물로 부르는 ’동물인지감수성‘. 언어폭력, 시선폭력, 표정폭력에도 민감한 ’폭력인지 감수성‘ 등 익혀야 할 새로운 신종예절이 많다.
nongju@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