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고장 함양의 남계서원이 작년 7월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서원의 세계인류문화유산 등재 노력은 2010년부터 시작되었으나 2015년 자진 철회 등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9년 만에 거둔 결실이라 더욱 소중하고 값지게 느껴진다. 서원의 세계인류문화유산 등재를 위해 국가적 차원에서 엄청난 노력을 했겠지만 우리 함양의 남계서원 임원진과 관계 공무원들도 고생을 무척 했을 것이다. 수고하신 모든 분께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싶다.
우리나라 서원사(書院史)에서 가장 두드러진 초창기 공훈자 세 사람을 꼽으라면 나는 신재 주세붕(周世鵬), 퇴계 이황(李滉), 개암 강익(姜翼) 선생 세 분을 꼽을 것이다. 주세붕 선생은 풍기군수로 있는 동안 성리학을 도입한 안향(安珦) 선생을 기리고 그 가르침을 펴기 위해 안향 선생의 연고지였던 관내 순흥에 1543년 우리나라 최초의 백운동서원을 설립했다. 그 후 황해도 관찰사로 나가서는 고려 때 해동공자(海東孔子)로 불렸던 문헌공 최충(崔沖) 선생의 연고지 벽성에 수양서원을 세웠다. 1550년의 일이었다. 서원의 창립도 확산도 주세붕 선생에 의해 이루어진 셈이다. 수양서원은 문헌서원으로 사액되었다가 그 후 훼철되었다.
두 번째 공훈자는 1548년 풍기군수로 부임하여 이듬해 백운동서원의 사액(賜額)을 주청(奏請)함으로써 1550년 소수서원(紹修書院)이라는 이름으로 사액을 받게 해 사액서원의 시대를 연 퇴계 이황 선생이다. 사액서원이 되면 사립학교격인 서원이 국가로부터 서적과 노비, 토지 등을 지원받을 수 있고 면세, 면역 등의 혜택을 받을 수 있었으니 서원 발전에 획기적 토대를 마련하여 준 것이다. 퇴계 선생은 그 후에도 과거시험에 얽매이는 관학(官學)보다 참된 인성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서원 교육의 진흥에 힘을 썼다.
세 번째 공훈자는 바로 남계서원 건립을 주도한 개암 강익 선생이다. 개암 강익 선생이 남계서원 설립을 주도할 때는 2년 전인 1550년 신재 주세붕 선생에 의해 멀리 황해도에 또 하나의 서원이 세워졌음을 알지도 못했던 것 같다. 정보 소통이 어려웠던 470년 전이었으니 그럴 수 있었을 것이다. 개암 선생 문집에 있는 그의 연보에는 “우리 동방의 서원은 주무릉이 세운 죽계 외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서원에 대해 보고 듣고 알지 못했기 때문에 딴 의견이 마구 생겼지만 선생은 의연히 동요되지 않고 결연한 의지로 할 일을 했다.(我東方書院, 惟周武陵設竹溪之外, 無有焉, 見聞未熟, 異議橫生, 先生毅然不動, 決意擧役)”고 적혀 있다. 우리나라에는 오직 죽계서원 하나만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주무릉은 신재 주세붕 선생을 말하며 죽계서원은 죽계천 가에 있기 때문에 소수서원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서원이란 것이 소수서원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할 만큼 낯설고 새로운 교육시스템이었는데 궁벽한 함양지역의 젊은 선비 강익이 어떻게 그런 서원 건립을 추진할 수 있었을까 참으로 궁금하다. 개암 강익이 남계서원을 세우자고 설두(設頭)하고 결의할 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 살이었다. 만 스물아홉의 청년 선비가 전례라곤 오직 소수서원 하나밖에 없다고 알고 있던 서원을 세우자고 제의하고 동의를 끌어내어 새로운 대역사를 이룬 동력은 어디에서 나왔을까? 그것은 아마도 그가 가진 두 가지 소중한 인맥에서 나왔을 것으로 생각된다. 하나는 당곡 정희보 선생의 서당에서 맺어진 동문과의 인맥이요 다른 하나는 얽히고설킨 이 지역 사족들 사이의 인척관계, 혈연관계 인맥이다.
남계서원에는 지난 수백 년 동안 작성되어 온 기부금 장부인 부보록(裒寶錄)이란 것이 있다. 부(裒)는 ‘모으다’는 의미요 보(寶)는 책이나 재물을 뜻한다. 부보록에는 서원 운영에 필요한 서책이나 재물을 기부한 사람과 기부 내역을 세세히 적고 있다. 그 내역에는 서책과 벼, 콩, 노비, 어물, 소금, 백지 등 다양한 물품들이 들어 있다. 남계서원이 건립되던 초창기 1555년부터 1559년 사이의 기부자와 기부 내역을 보면 남계서원 창건의 동력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알 수 있다.
지례현감 노진(盧禛) 벼 넉 섬 열다섯 말 / 진사 강익(姜翼) 한 섬, 콩 한 말 / 정업(鄭業) 한 섬 / 박승원(朴承元) 두 섬, 콩 서 말, 논 아홉 두락 / 정복현(鄭復顯) 두 섬, 콩 두 말 / 정승(鄭乘) 너 말 여덟 되 / 노관(盧祼) 두 섬 아홉 말, 콩 서 말 / 진극흥(陳克興) 한 섬 열여덟 말, 콩 한 말, 밭 열 두락 / 노흠(盧欽) 두 섬 / 임희무(林希茂) 두 섬, 콩 한 말 / 이숙(李俶) 한 섬, 콩 두 말 / 임희수(林希秀) 열 말, 콩 한 말 / 정심언(鄭審言) 너 말 너 되 / 권선(權璿) 열아홉 말 / 정율(鄭栗) 한 섬 / 조승서(趙承緖) 너 말 닷 되 / 양홍택(梁弘澤) 닷 말, 콩 한 말 / 박현우(朴賢佑) 너 말 너 되 / 강진(姜軫) 너 말 닷 되 / 노사준(盧士俊) 한 섬, 콩 한 말 / 밀양부사 서구연(徐九淵) 주자어류(朱子語類) 오십 권, 계지(溪志) 삼 권 / 함양 군수 윤확(尹確) 대전(大全) 열 권, 언행록(言行錄) 12권, 예기(禮記) 16권 / 담양부사 노진(盧禛) 십구사략(十九史略) 8권. . .
이 부보록에 나온 사람들의 면면을 보면 노진, 강익, 정복현, 임희무, 양홍택 등이 모두 당곡 정희보 선생 문하의 동문이며 정업, 정승, 정율은 당곡 선생의 아들들이다. 노사준은 노진과 노관의 조카이며, 노진•노관 형제와 임희무•임희수 형제는 삼괴당 권시민 선생의 외손자들로 이종간이다. 또한 임희수는 개암 강익의 매부이며 동계 정온의 이모부다, 개암 강익의 사촌 강규(姜奎)는 박승원(朴承元)•박승남(朴承男)의 매부이며 이들 셋은 또한 당곡 정희보의 처질서(妻姪壻)와 처조카이다. 박승원의 처는 청연 이후백(李後白)의 누이이고 강규의 딸은 임희무의 며느리이며, 동계 정온의 아버지 역양 정유명은 노진의 외할아버지 권시민 공의 처손자로 노진과는 6촌간이다. 당곡 선생의 문도라는 동문 인맥과 헷갈릴 정도로 얼키고설킨 이 지역 사족들의 혼맥 속 인간관계 그리고 서구연과 윤확 같은 관인(官人)들의 적극적 지원이 있었기에 남계서원 건립이라는 대역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여기 당곡(唐谷) 선생 사후에 함께 적을 옮겨 맺어진 남명(南冥) 조식(曺植) 문도(門徒)로서의 두터운 인맥이 더해져 세계인류문화유산 남계서원으로 설 수 있는 튼실한 바탕이 마련되었다고 생각된다.
최초의 서원인 소수서원은 좌묘우학(左廟右學) 배치 구조나 강학당 뒤쪽에 ㄱ자로 배치된 재사(齋舍) 구조 등으로 그 후에 세워진 서원들과는 다른 모습을 지니고 있다. 대부분의 서원은 전학후묘(前學後廟), 동서양재(東西兩齋) 형식으로 지어져 있는데 남계서원이 그 효시이다. 또한 남계서원은 유림이 공론을 모아 만든 최초의 서원으로 뒷날 서원 건립의 모델이 되었다.
세계문화유산 등재를 계기로 남계서원이 향사(享祀) 기능을 넘어 양사(養士) 기능까지 활성화하여 현대사회가 요구하는 인성교육의 장으로 거듭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세계인류문화유산 남계서원이 지닌 문화적 가치는 우리 함양의 새로운 도약과 성장을 위한 중요한 자원으로 엄청난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잘만 하면 산삼엑스포보다 더 엄청난 발전에너지를 여기서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안동이 도산서원으로, 영주가 소수서원으로, 장성이 필암서원으로 전국적 명성과 경제적 이익을 지속적으로 창출하고 있는 것이 좋은 예이다. 남계서원(灆溪書院)과 군(郡)이 긴밀히 협조(協助)하여 서원의 기능을 활성화하고 역할을 확대해 나감으로써 개암 강익 선생이 이룩한 기적 같은 성취가 앞으로 우리 함양에서 다시 일어난다면 나는 흥에 겨워 춤을 추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