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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현 출향인의 고향 그리기] 대고대(大孤臺) 석송(石松)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0/06/29 [13:36]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 연합회 회장    © 함양신문

  수동면과 지곡면, 어쩌면 유림면이나 안의면의 국민학교 졸업생들까지도 대고대로 소풍을 다녀온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요즘 학생들이야 차를 타고 먼 곳까지도 다니지만 차가 귀하던 시절 소풍지는 걸어서 다녀올 수 있는 근방 명소일 수밖에 없어 대고대는 인근 학교들의 단골 소풍지였으니 말이다.

 

  대고대는 본래 남계천(灆溪川) 도랑 가운데 우뚝 선 거대한 돌바위다. 한자로는 대고대(大孤臺) 또는 대고대(大高臺)로 표기되었다. 대(臺)는 높고 평평한 곳을 의미한다. 남계천에 외로이 선 큰 바위였기에 대고대(大孤臺)요, 우뚝 높이 솟은 평평한 바위였기에 대고대(大高臺)라고 했을 것이다. 대고대는 ‘떨어진 바위’, ‘부래암(浮來岩)’이라고도 하는 데 큰물에 바위가 떠내려오는 것을 보고 여인이 소리를 질렀더니 그 자리에 멈춰 섰다는 전설에서 유래된 이름이다. 전설과 한자로 보면 ‘떨어진 바위’라기 보다 ‘떠내려온 바위’라 하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입지(立地), 형상(形相), 전설(傳說) 그리고 수많은 시인 묵객들이 높은 대 위에 앉아 흐르는 남계수를 완상하며 남긴 시와 글씨 이런 것들이 어우러져 대고대는 인근 지역 최고의 명소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대고대와 남계천 사이에 높은 둑이 쌓이고 대구광주고속도로가 옆을 지나는 바람에 본래의 풍취(風趣)가 사라져버렸으며 농촌 인구감소로 인근 학교들도 대부분 폐교되어 소풍 오는 학생들도 없어져 버렸다. 거기다 각박한 현대 생활로 고아한 풍류객들의 발걸음도 끊긴 지 오래라 이제 대고대는 잊혀진 곳이 되고 말았다. 이름 그대로 ‘크게 외로운 곳[大孤臺]’이 되어 버렸다.

 

  삼십 년 전 젊은 시절, 대고대 바위에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가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는 탁본 도구 챙겨 들고 찾아간 적이 있다. 그 큰 바위 표면에는 수많은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어린 시절 소풍 갔을 때도 그 자리엔 많은 글자가 있었겠지만 그땐 그 글자들이 하나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었다. 대고대는 음미할 만한 글자들이 새겨진 역사적, 문화적, 교육적 공간이 아니라 즐겁고 신나는 소풍지였을 뿐이다. 친구들과 나무 우거진 바위 위를 기어오르고 벌어진 바위틈 사이를 드나들며 즐겁고 신나게 놀았던 기억만 남아 있는 것을 보니 사람은 아는 만큼만 볼 수 있다고 그때는 그 글자들이 있어도 보이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날 추사 선생 필적을 찾기 위해 바위 곳곳에 새겨진 글자들을 더듬어 나가다가 생각지도 못한 귀한 만남을 가졌다. 많은 글 속에서 묵헌(黙軒)이란 글자를 만난 것이다. 살아가면서 쓸데없는 말을 줄이고 대고대 바위처럼 과묵(寡默)한 사람이 되자고 서원(誓願)했던 누군가의 결연한 의지가 느껴져 그날 이후 나도 그런 사람이 되자는 바램으로 묵헌(黙軒)을 자호(自號)로 써왔으니 나로서는 매우 귀한 만남이었다.


  대고대 바위 위에는 100여 명이 앉을 수 있을 만큼이나 넓고 평탄한 암반 광장(岩盤廣場)이 있다. 옛날에는 이곳에서 선비들의 강회(講會)나 시회(詩會)가 열리기도 했다는 데 지금은 바위 균열 사이로 작은 대나무들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다. 삼십 년 전에는 그 암반 에 뿌리를 내리고 살았던 소나무 고사목(枯死木)이 남아 있고 바로 그 아래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선생의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추사 선생까지도 감동하여 글씨를 쓰게 했던 나무였으니 추사 선생 당시에는 대고대 높은 바위 위에 뿌리를 내리고 선 낙락장송이었으리라. 극한(極限)의 환경 조건에서도 굳건하게 뿌리내리고 당당하게 서 있는 소나무 앞에서 경탄(驚歎)과 경외심(敬畏心)으로 당장 지필묵 꺼내어 석송(石松)이란 글자와 추사(秋史)라는 자신의 호를 새기고 있는 선생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탁본 액자는 그날 찍은 석송 고사목 사진 한 장과 그날 감회를 적은 시 한 편을 품고 삼십 년 동안이나 내 서재를 지키며 고향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다. 삼십 년이란 세월은 인간만이 아니라 자연도 긴 세월이었던 모양이다. 지난 오월 코로나19 난리 속에 다시 찾은 대고대에는 석송 고사목이 사라지고 없었다. 애써 흔적을 찾았더니 대 아래 낙엽 속에 묻혀서 썩어가고 있었다. ‘대고대 석송 아래서, 경오년(1990년) 5월 10일 추사의 필적을 탁본하며’라는 부서(付書)의 감회(感懷)가 더 절실하게 느껴졌다.

 석송(石松)의 불변(不變)을 노래한 이 누구던가

 
 추사(秋史)의 힘찬 필적(筆跡) 아직도 선명(鮮明)한데 
 암반(岩盤) 위 낙락장송(落落長松) 백골(白骨)만 남았구나.

 불변 절개(不變節槪) 표상(表象)이던 석송(石松)조차 이렇거늘 
 뉘라서 인간사(人間事)를 영원(永遠)으로 말할건가 
 오늘 하루 최선(最善) 다해 사랑으로 살고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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