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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호]황석산성에 강력한 진내사격을(1)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8/12/10 [11:37]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박선호  황석역사연구소장    © 함양신문

  일본인들이나 식민사학자들이 쓴 『임진전란사』를 아직도 임진전쟁의 교과서처럼 철석같이 믿고 그것이 진실처럼 믿고 신봉하는 한 『백성의 전쟁 황석산성 대첩』은 빛을 볼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역사 정유전쟁의 진실에 접근을 했다라고 볼 수가 없다.  

  왜냐하면 조선 8도 중 4도분할 이라는 목적으로 전라도를 공격하기 위하여 재침략의 정유전쟁을 시작하면서 제일먼저 실시한 작전은 부산 앞바다에 <가도오기요마사라는 장수>를 미끼로 던져서 조선조정을 농단하여 이순신이 가도오를 공격하면 이순신은 부산앞바다에서 일본군에게 참수를 당할 것이고 공격하지 않으면 선조에게 항명하는 것이 되어 조선왕에게 사형을 당할 것이라는 철저하게 계산된 <풍신수길의 이순신 참수작전>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중간목표인 황석산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수십 여 명의 첩자를 운영하여 황석산성에 대한 충분한 연구를 한 후에 공격을 하는 일본군의 전술을 이해지 못하면 정유전쟁은 연구를 할 수가 없다.  

  이순신은 풍신수길의 참수작전에 부산앞바다에서 참수를 당하여 생을 마감할 것인가?  선조의 공격명령을 거역하여 항명을 함으로서 사형을 당하여 죽은 순간까지 시간을 벌 것인가를 두고 이순신 장군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고 또 번민을 하였을 것인가?  결과적으로 이순신 장군이 선조의 공격명령에 대해 사형을 전제로 자신의 생명을 포기하는 항명(抗命)을 함으로써 개인적으로는 처절한 슬픔과 극도로 긴장된 고통의 시간이 되었지만, 무용지물이 된 제승방략전술에서 진지고수를 위한 진관제로 전환한다는 1594년 3월29일의 선언 후에도 전투준비가 전혀 되지 않은 조선군에게 축성을 하고 전투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벌어줌으로써 나라를 구하는 위대한 항명이 되었다.  이순신이 2월26에 체포되고 황석산성은 3월부터 축성을 시작하여 7월말에 완료하였고 황석산성의 축성이 완료된 후 이순신은 모리데루모도의 일본우군이 화왕산성을 통과하는 8월3일 복권이 되고 황석산성의 백성군이 일본우군을 8월 한가위에 궤멸시켜 남원성을 공격한 좌군을 북진케 유도함으로서 전라도를 20여 일간 군사적으로 빈 공간을 만들어서 이순신이 조선수군을 재건하고 9월16일에 명량대첩을 성공적으로 치르게 되는 것은 우연인가 조선의 운명인가?  

『임진전란사』에서 일본인들이 직접기록을 했거나 아니면 식민사관에 세뇌된 식민사학자가 기록하고 오늘날의 식민사학자들이 그대로 믿고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우군은 합천에서 거창으로 진출하여 전열을 정비한 후  <주력군은 안의를 거쳐 육십령을 넘어 진안으로 향하고>  <일부병력으로 별군을 편성하여 안의에서 함양과 운봉을 거쳐 남원으로 향하게 하여 산속에 은닉되어 있는 곡식을 수색토록 하였다.>  <가토 기요마사군은 경산 우도로 들어와서 안의에서 육십령으로 향하던 중, 안의 거창 함양 일대의 군민들이 안의 북쪽의 황석산성에 집결되어 있다는 것을 알고 황석산성을 공격하였다.>”  리고 기록함으로서 일본군이 적전분열을 하는 정도로 전술의 원칙도 모르는 지극히 무식한 군대로 폄하를 하였다.

  적진 앞에서 적전분열(敵前分裂)을 하는 그런 군대가 이 세상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조선 8도중 4도 분할이라는 중차대한 목적을 가지고 14만 여명을 동원하여 일본의 명운이 걸린 국가적인 대사를 치르는데 중간목표인 안음현의 황석산이라는 거대한 적진(敵陣) 앞인 경남 거창에서 분열하는 재편성을 했다는 이야기를 역사라고 임진전란사에 기록한 자와 그것을 그대로 믿고 의심한번 하지 않는 학자가 세뇌된 식민사학자가 아니라는 말을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 우군대장은 황석산성에서 부상을 당하여 전주성에서 잔류하여 종군승인 게이넨(慶念)의 치료를 받았고 종군승 멘고렌조보의 고려일기에서 전라도 통치를 위한 우기다히데이에의 9월15일의 1차 익산군용안현의 재편성과, 9월16일의 정읍에서의 2차 재편성에서 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가 패잔병이 되어 북진부대가 되지 못하고 재편성이 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함양문화원에서 발간한 2017년 11월16일 실시한 황석산성전투 학술회지 21p 주석에 이렇게 설명되어 있다.

  “정유재란에 참전한 일본군의 각종자료에는 3만 명의 병력을 거느린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가 우군대장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모리데루모도는 개전기에 병으로 귀한하고 이때부터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가 모리군을 지휘하였다.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가 지휘권을 양자(養子) 모리히데모도(毛利秀元)에게 넘기고 자신은 유군(遊軍)적 존재였다.”  라고 기록함으로서 황석산성에서 부상자가 되어 식물인간이 되고 수개월간 대장의 역할을 상실한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의 존재를 감추려는 꼼수작전을 시작하고 있다.

  <유군(遊軍)적 존재> 라는 용어의 사용은 생각해 보면 적절한 것으로 판단된다. 이리 저리 정처도 없이 떠돌아다니는 유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한 것은 대장이라는 지휘관의 역할은 할 수가 없지만 모리데루모도(毛利輝元)가 전투 현장에는 그대로 있다는 것을 인정을 하는 것이 된다. 모리데루모도 우군대장이 황석산성에서 큰 부상으로 들것에 실려 전주성으로 이동하고 식물인간이 되어 지휘권을 상실하였고 치료를 받다가 9얼15일 전북익산용안현에서 실시한 1차 재편성에서 전라도 영광으로 배치되었으나 가지 못하고  정읍에서 실시한 2차 재편성에서 전남장성진원현으로 이동하여 치료를 했고 명량대첩 이후에는 전라도에서 부산왜성으로 돌아갔으니 <유군(遊軍)이 되었다>라는 말은 패잔병이 되고 부상으로 이리 저리 끌려 다니는 모리데루모도의 처량한 신세를 적절히 표현을 한 것으로 풀이된다. 군사적으로 유군(遊軍)이란?  빨찌산이나 Ranger 즉 유격대를 말하는데 일본우군대장 모리데루모도가 정유전쟁에서 유격활동을 했다는 말인지?  6.25사변 지리산 빨찌산의 원조가 모리대루모도 우군대장이라는 말인지?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기록을 역사학계가 믿고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인 듯하다.  

  이러한 기록들은 모두  일본총독부가 일본국사대사전에서 모리히데모도가 3만 명을 데리고 천안으로 올라갔다라고 조작한 것을 꿰어 맞추는 꼼수고 황석산성전투에 7만5천3백명이 참전하여 4만8천3백명이 사라지고 패잔병 2만7천명만 전주성으로 들어갈 정도로 궤멸을 당한 황석산성 대첩의 흔적을 감추기 위하여 왜곡 조작한 것들이다.  일본국사대사전의 일본군기동로에 천안으로 올라간 그 많은 병력들이 그 후에 어디로 갔는지? 무엇을 했는지? 전혀 답이 없어 일본국사대사전이 조작된 거짓말이라는 것이 들통이 난다. 그동안 조선의 역사학계는 투입과 산출이 전혀 일치되지 않은 모리히데모도가 3만명을 이끌고 천안으로 올라갔다는 일본국사대사전을 그대로 믿고 의심한번 하지 않는 학자가 과연 조선의 역사학자인지 묻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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