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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천의 風水談論(52) 대한민국의 탄생과 國父 李承晩(Ⅲ)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8/08/10 [17:02]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 함양신문

 

󰁱3만 달러/1조 달러 클럽에 가입하다

대한민국은 2018년 기준 GDP 32,774달러, 무역규모 1조 달러 클럽에 가입할 세계 일곱 번째 국가가 될 예정이며, 2차 세계대전 후 탄생한 나라 중 처음이자, 북한보다 경제규모가 40배나 크고, 러시아보다 국민소득이 높은 나라가 되었다.

우리는 1945년 해방정국의 혼란기에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의 갈림길에서 이승만이 목숨을 걸고 민주주의를 선택함으로써 자유대한민국 탄생을 이루어낸 가슴 벅찬 순간을 망각하면 안된다. 역사의 기억은 그 민족, 국가가 번영의 길을 가느냐, 멸망의 길을 가느냐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이고, 공산주의를 선택한 김일성과 민주주의를 선택한 이승만의 차이가 이를 입증 하고 있다.

󰁱1948. 8. 15. 대한민국의 탄생 과정

1910년 이전의 우리 조상은 조선조 국왕의 신민(臣民) 었다. 19108~1945815 까지는 일본 천황의 신민이었으며, 19459~ 19488월까지는 미 군정하의 시민(市民)이었지만, 19488150시부터 미 군정청으로 부터 주권과 정부 조직을 인수 받음으로써 비로소 대한민국 국민이 되었다.

1948510일에 치룬 총선은 오천년 역사상 자유시민이 주권을 행사한 첫 번째 사건이다. 그들에 의한 주권재민의 원칙으로 헌법이 승인되고 합법적 정부가 들어서서 대한민국의 건국이 선포된 것이다.

이때 선포된 대한민국의 국호는 임시정부가 선포한 국호가 아니라 1948510일 총선의 실시로 개원한 제헌국회의 '헌법기초위원회' 67일 투표로 국호

를 정했는데, 이승만이 주장한 '대한민국'

17, 김성수 등 한민당이 주장하는 '고려공화국' 7, 기타 '조선공화국' 2, '한국' 1표 가운데 '대한민국' 을 국호로 결정하고, 국회 본회의가 추인 및 채택했다.

󰁱해방 당시 국민들의 정치사상

자유민주주의를 떠받치는 '개인' '자유' 이념은 해방정국의 대다수 국민에게 낮선 손님과 같았고, 그에 저항하는 민족주의나 공산주의와 같은 이념은 여전히 많은 국민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다.

공산주의자들의 저항은 미 군정청 시절 멈추기는 커녕 더욱 대규모로 조직화하였다. 1947년 미 군정청의 여론조사 결과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의 지지율을 합하면 76%나 되었다.

미국은 당시 한반도에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국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좌우합작정부를 세운 후 명예롭게 철수하는 것이 일관된 정책이었다. 그리하여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주장하는 이승만과 이에 반대하는 하지는 반목을 거듭하던 중 결국 하지중장이 이승만의 주장을 인정 및 타협하여 1947. 8. 12. '과도입법의원 보통선거법' 을 통과시켰으며, 이승만은 미국의 협조하에 남한만의 총선 및 단독정부를 구성하는 주장을 관철시켰다.

이에 미 국무장관 마샬은 9. 17. 한국문제를 '유엔총회에 상정제의' 연설을 하였으며, 한반도 문제를 유엔 소총회로 이관시키고, 1947. 11. 14. '유엔감시하의 남북한 총선거' 를 가결하였으나 남한에 비해 인구가 적은 북한이 불리하다고 판단한 소련이 거부하여 남한만의 총선과 단독정부 구성을 승인하게 되었다.

󰁱민족주의자들의 반대

그러나 김구, 김규식, 여운형 등 민족주의자들은 끝까지 남한만의 단독정부 구성을 반대하였다. 당시 이들은 소련이 동유럽에서 체코, 루마니아, 항가리, 폴란드, 유고슬라비아를 공산화 시켰고, 중국이 공산화 일보 직전이었으며, 터키, 그리스, 프랑스, 이태리를 공산화시키려는 음모를 알지 못하는 등 국제정세에 깜깜했으며, 소련의 한반도 적화 술책, '무엇을 어떻게 하는 것이 조국에 이로운지' 알지 못하고 허울좋은 '통일정부''민족주의'만 부르짖었다.

󰁱이승만 초대 대통령에 당선되다.

1948. 5. 10. 유엔의 감시하에 대한민국 최초의 선거가 진행되었는데 이승만이 주장하는 선거방식은 철저히 자유, 비밀투표이고, 선거권을 가진 남녀 노소, . 부나 계급의 귀천 없이 11표제였다. 참고적으로 스위스의 경우 1960년대까지는 여자들의 참정권이 없었으며, 링컨이 남북전쟁 후 흑인들을 해방시켰지만 이들은 수 세기동안 참정권이 없었다.

󰁱김구와 이승만의 차이

5. 10 선거는 198명의 국회의원을 뽑았으며, 720일 정. 부통령선거가 실시 됐다. 투표는 무기명투표로 진행되었으며, 국회 내 주요세력들이 후보를 추대했다.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196표 가운데 180표를 얻어 92.3%라는 압도적인 득표율로 당선되었으며, 차점자는 13표를 얻어 6.63%의 득표율을 보인 김구였다(3위는 안재흥 2, 서재필 1/무효처리).

이어서 진행된 부통령선거는 이시영과 김구의 대결 양상이었다. 1차 투표결과 이시영 113, 김구 65, 조만식 10, 등으로 김구가 2위를 했는데 과반수 득표자가 없어 2차 투표의 표결과 김구가 1차 보다 3표가 적은 62표를 얻은 반면 이시영은 1차보다 20표가 많은 133표를 획득해 부통령에 당선 되었다.

이것은 당시 이승만과 김구의 위상, 김구는 부통령선거에서도 압도적 표 차이로 낙선할 만큼의 인물이었다는 사실, 김구는 당시 신익희, 조병옥, 장면보다도 한수 아래였고, 이승만의 정적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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