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함양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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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심은 반드시 禍를 同伴한다
오랜만에 고향엘 갔더니 군청 청렴도 하락에 대한 탄식이 끊이지 않았다. 역대 민선 군수 중 J군수를 제외한 전원이 큰집을 들락 거렸으니.....
그런데 상경을 하니 더 큰 사건이 뉴스를 도배하고 있다. 아마도 함양신문 제1212호가 발행될 무렵이면 또 한사람의 전(前) 대통령이 구속될 것 같다. 전직 대통령 중 박수 받고 청와대를 떠난 사람이 없었던 것은 모두가 권력에 취해 욕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에 반하여 조선왕조 초기 왕권다툼으로 살벌한 시대에 마음 비우고 '현명하게 처신하여 천수를 누린' 2대 정종의 삶이 더 돋보이는 것은 필자만의 생각일까?
방과(영안대군) 정종, 권좌를 포기하다
원치 않았던 권좌,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권력의 칼 날 위에서 훌쩍 뛰어내린 왕이 있었으니 조선 제 2대왕 정종이다.
정종은 42세~44세(1389. 9~1400. 11)의 2년 2개월 동안 왕위에 있다가 동생 방원에게 양위하고 편히 살다 63세에 죽었는데 그의 처신으로만 본다면 어딜 보아도 왕으로서의 야심, 패기, 결기가 보이지 않아 2대 정종이란 묘호가 아까운 분이다.
사실 그는 오랫동안 묘호도 없이 '공정왕' 으로 불리다 사후 262년 만인 1681년(숙종 7)에 '정종' 이란 묘호를 받았으니 방원이 왕권을 접수하기 위해 잠시 머문 부교(浮橋)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종은 대세를 좇아 1400년 2월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세제' 가 아닌 '세자' 로 책봉된 이유는 정종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으려는 당시 조정 분위기 때문이었다. 형식적으론 방원이 정종의 뒤를 이었지만 실제론 태조의 세자자격으로 왕위를 이었다는 뜻이다. 권력은 쟁취하는 것이지 엉겹 결에 받아든 밥상이 아니므로.....
정종은 아버지 이성계의 역성혁명, 왕자의 난 등을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보았기 때문에 권력의 속성을 잘 알고 있었다. 목숨을 걸지 않으면 쟁탈전의 승자가 될 수 없고, 승자가 되라는 보장도 없다.
정종(1367~1419)도 한때는 무장이었다. 청년시절 아버지 이성계를 따라 인월, 운봉(황산)전투에서 왜구를 토벌했고, 1390년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옹립한 공으로 밀직부사에 오르기도 했으나 성품이 곧고 방정하여 음모를 몰랐고, 야심도 없었으며, 자리를 탐하는 측근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혈육 간 충돌도 피할 수 있었다.
당시는 1차 왕자의 난이 성공을 거두고 세자책봉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였으나 이미 판세를 읽고 있었다. 그는 세자 자리를 권하는 방원에게 말했다. "조선을 개국하여 오늘에 이른 업적은 모두 정안군(방원)의 공인데 내가 어찌 세자에 오를 수 있겠는가?"
방원은 간청한다. "큰 형님(방우)이 돌아가시고 없는 마당에 형님이 장자이시니 장자가 대통을 이어야 합니다. 엎드려 비오니 내치지 마십시오."
방원의 속내를 잘 아는 정종은 자칫 화병으로 쓰러질지 모르는 아버지를 위해 마음을 비우고 잠시 방원의 다리가 되어주기로 결심했다.
왕위에 오른 정종은 스스로 다짐한 각오를 지켰다. 세력을 모으는 낌새가 있으면 야밤중에라도 방원의 수하들이 칼을 들고 침전으로 쳐들어 올 것이다. 내관들도 방원 측 인물들이다. '무자식이 상팔자' 라고 정안왕후 김씨 사이에 후사가 없었던 것도 천수를 누리는데 도움이 되었다.
정종은 2년 2개월의 '권한대행' 을 마치고 편하고 자유로운 상왕 노릇을 19년간 했는데, 이렇게 결단을 내리는 데는 정안왕후 김씨의 영향이 컸다. 왕후는 정종의 즉위 때부터 조심스럽게 반대했다.
"그 자리는 우리 자리가 아닙니다. 바람 부는 방향은 이미 정해졌는데 돛단배가 어찌 거스를 수 있겠습니까?" 왕후는 고려 공민왕 때 문하좌시중(부총리) 월성부원군 김천서의 딸로서 사려 깊고 공손한 성품의 여인이었다. 덕행으로 아랫사람을 다스리고 진정한 우애로서 친족들과 소통했다.
정종은 부인을 달랬다. "하늘의 뜻이 우리에게 있지 않다는 것도, 발을 잘못 들여놓으면 목숨을 부지할 수 없다는 것도 압니다. 그러나 방원의 뜻이 하늘의 뜻보다 강하니 어쩌겠소."
정종은 왕위에 앉은 2년 동안 뛰어 내릴 궁리만 했다. 덕분에 3대 왕으로 즉위한 태종으로부터 극진히 예우를 받았다. 태종은 1400년 12월 상왕 전에 나가서 '인문공예상왕' 이란 존호를 올리고 이르기를, "태조에 이어 정사에 나아가 나라를 평안케 하셨고 소제에게 인애를 다하여 즉위토록 명하셨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께서는 도를 즐기시고 한가로이 지내시면서 마음을 편안히 가지시옵소서."
이것은 방원의 진심이자 권력을 얻은 자의 아량과 시혜였다. 정종은 그 뜻을 혼쾌히 받아 실행했다. 상왕은 10명의 부인을 거느리고 17남 8녀를 생산했으며, 격구, 온천여행, 사냥을 즐기는 등 천수를 누린 후 63세, 왕후는 58세에 죽었다.
정종은 무능하고 겁 많은 소인배인가? 시대의 코드를 읽은 대장부 인가? 우리는 그를 정확히 알지 못하지만 마음을 비우면 천수를 누릴 수 있다는 교훈을 얻었다.
정종은 죽어서도 인정받지 못하여 한양 인근이 아닌 개성 판문군 령정리에 있는 후릉에 묻혔다. 조선 왕들 중 유일하다. 태종은 당대의 명 석수 쟁이 박자청을 보내어 릉에 병풍석을 두르고 면석에 12지상을 새겼으며, 두 쌍의 문인석, 무인석을 세우고, 왕과 왕비의 능 앞에 장명등을 세우게 하는 등 후히 장사지냈다 한다.
(本文은 소설가 이우상님의 "왕릉에서 불교를 읽다"를 참고 하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