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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천의 風水 談論(43) 버들잎 한줌에 운명이 바뀐 여인(신덕왕후)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8/03/19 [14:47]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함양신문


󰁱버들잎 한줌이 朝鮮 最初의 王妃로...

 
  태조 이성계가 젊은 시절 부하들과 호랑이 사냥을 다녀오다 목이 말라서 물을 찾던 중 우물가에서 물 긷는 처녀를 보고,

 
  "낭자, 물 좀 주시오" 라며 가쁜 숨을 쉬며 말에서 내렸다. 처녀는 두레박으로 퍼 올린 샘물을 바가지에 부어 건네려다 멈칫하더니 우물가에 있는 버들잎 한 줌을 따서 물에 띄운다. 화가 난 이성계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요!"

 
  수하 장졸들도 덩달아 눈을 부라렸다.     처녀는 차분히 말했다. "갈증이 심한 것 같습니다. 급히 드시면 목이 막힐 것 같으니 버들잎을 불어가며 천천히 드십시오"

 
  이성계는 그녀의 지혜와 미모에 놀라 한 동안 넋을 잃었다. 알고 보니 처녀는 판삼사사(判三司使) 강윤성(康允成)의 따님이었고, 그녀의 숙부 강윤충, 강윤희 형제들 또한 개경의 권세가들이었다. 이성계는 고려 말 최고로 용맹을 떨치는 장수였지만 개경에서는 '변방의 장수' 였다. '큰 꿈' 을 위해 개경 호족들과의 든든한 연줄이 필요하여 20세 연하의 강씨와 정략결혼을 했다, 이후 권문세족이었던 강씨 친정은 이성계의 권력형성과 조선 개국에 큰 힘이 되었다. 당시는 적서(嫡庶) 차별이 없었다.

 
  그런데 이성계의 첫 째 부인 한씨는 6남 2녀를 낳고 조선 개국 전 해에 죽었다(55세). 1392년 태조가 왕위에 오르자 강씨는 현비(賢妃)로 책봉된다. 조선 최초의 왕비이자 사후 존호를 신덕왕후(神德王后)로, 능호가 '정릉' 으로 추존된 분이다.

 
 󰁱왕비의 자식사랑 화근이 되다

 
  왕비는 태조의 극진한 총애를 받아 방번, 방석 두 아들과 경순공주를 낳았다.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도 방원보다는 왕비의 편이었다. 그러자 자신이 낳은 아들이 대통을 이을 세자가 되어야 한다는 욕심이 생겼다. 왕비는 태조와 그를 따르는 중신인 정도전, 배극렴, 조준 등 원로들과 은밀히 협의하여 둘째아들 방석(11세)을 세자로 책봉하는데 성공했으나 조선의 개국에 제일 공이 큰 27세의 본처소생 방원은 이를 갈면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신덕왕후는 자식들에게 엄청난 화근덩어리만 남기고 1396년 9월 15일  갑작스레 죽었다(40세 정도였다 함). 이때 예순 둘의 태조는 군왕의 품위 마져 망각하고 대성통곡했다고 한다.

 
  태조는 궁에서 가까운 정동에 신덕왕후의 릉(정릉)을 조성했으며, 원찰로 능 동쪽에 170간의 흥천사를 세운 후 정릉의 아침 재 올리는 종소리를 듣고서야 수라를 들었다고 전한다. 홍천사는 연산군 때 화재로 소실되고 태조의 상심을 위무했던 홍천사 대종은 몇 차례 자리를 옮겨 다니다 지금은 덕수궁에 있다(흥천사는 정릉에 있음).

 
  1. 2차 왕자의 난으로 실권을 잡은 방원의 보복은 무자비했다. 이빨 빠진 호랑이가 되어버린 태조는 아무런 힘이 없었다. 방원이 즉위하자 정릉파괴가 시작된다.

 
  "정릉은 도성 안에 있고 능역이 광대하다 능역 100보 밖까지 주택지로 허 한다" 고 명했다. 하륜 등 세도가들은 얼씨구나 하고 다투어 정릉의 나무를 베어내고 집을 지었다. 태종 8년(1408) 태조가 죽자 정릉의 운명도 곤두박질쳤다. 태종은,   

 
  "도성 안에 능이 있다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장하라. 강비(康妃)는 선왕의 둘째 부인이다 후궁으로 예우하라" 고 명하자 정릉을 양주 사한리(현재 성북구 정릉동)로 옮기고 '능' 을 '묘' 로 격하시킨다.   

 
 이 뿐이 아니었다. 태종은 아예 서자들의 벼슬길 진출까지 국법으로 정해 막았다.

 
  정릉을 파묘하면서 무례와 무성의가 난무했다. 병풍석은 허물어 궁궐 공터에 야적했다가 청계천 광통교가 홍수로 유실되자 그 석물 일부를 가져다 썼다.  현재 정릉에는 병풍석이 없다.

 
  어진 임금으로 추앙되는 세종도 종묘에서에 지내던 제사를 폐하고 족친들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더니 즉위 8년에 신덕왕후의 영정도 불살라 없애도록 명했다. 신덕왕후를 정비로 인정하지 않았다는 증거다.

 
  이렇게 잊혀지고 무시 받다가 1669년 현종 10년 11월 1일 겨울비가 내리던 날 정릉의 정자각이 완공되고 종묘에서는 신덕왕후의 신위가 260여년 만에 태묘에 배향 되었다. 복권된 날이다. 이날 내린 비를 세원지우(洗寃之雨)라고 전한다.

 
󰁱그래도 대 명당에 묻힌 왕비

 
  필자는 청백리를 뺀 벼슬아치나 부덕(不德)한 자가 명당에 든 것은 보지 못했다.    그러나 당시 태종의 무자비한 복수극에도 목숨을 건 사람이 있었으니 서운관 소속 국지사(國地士)였다. 그는 신덕왕후의 능이 파헤쳐지고 '묘' 로 강등되어 쫒겨 나자 서러운 혼령이나마 편히 쉴 수 있는 북한산 자락의 대 명당 정혈(正穴)에 이장했다. -왕이 명당인줄 알면 죽음 뿐이다-

 
  필자는 '묘' 로 강등되었던 '능' 이니 오죽하겠냐는 선입관을 가지고 묘역을 둘러보았는데 대 명당 정혈에 안장된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래용맥(來龍脈)은 북한산 보현봉(평창동 뒷산)에서 경복궁으로 가는 주맥과 분맥 되어 '북악스카이웨이' 능선을 지나 이곳으로 오는데, 대 지맥(大 地脈)으로서 손색이 없고, 언덕위에 우뚝 선 묘역은 '왕비의 묘' 가 아닌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영웅의 묘역 같았으며, 청룡은 굳세게 뻗어내려 터를 감싸고 안산을 이루니 그 환포한 형국은 가히 일품이다. 백호는 청룡 끝을 겹겹이 관쇄하였고, 북한산 계곡을 흐르는 옥수(玉水)는 궁수형(弓手形)으로 묘역을 감싸 돌고, 수구는 좁아 장풍(藏風)과 내기(內氣)를 보호하니, 결국 신덕왕후는 비록 사후에 박해 받았으나 조선 왕릉 중 최고의 명당이라는 '영릉' 에 버금가는 명당 터에 영면하고 있었다. 북한산 신령(神靈)도 망자의 비극을 슬퍼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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