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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천의 風水 談論(42) 정종의 開城 還都, 太宗의 漢陽 還都!!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8/03/12 [10:42]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함양신문

 

󰁱제 1차 왕자의 난이 발생된 이유

 

태조 이성계의 첫째 부인 한씨는 6남 2녀를 낳고 조선의 개국 전(前)해에 죽었으므로 계비(繼妃) 강씨(康氏)가 현비에 책봉되니 조선 최초왕비 신덕왕후(神德王后)다.

 

태조는 신덕왕후를 끔찍이 사랑하여 그의 몸에서 태어난 여덟째 왕자 의안군(宜安君) 방석(芳碩 : 11세)을 세자로 책봉했다.

 

이때 개국 일등공신 정도전은 신덕왕후 와 손잡고 태조의 첫째부인 한씨, 즉 신의왕후(神懿王后)가 낳은 왕자들을 배제한 채 방석의 세자책봉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정도전은 제자이기도 한 방석이 자신의 정치 신념인 재상중심의 신권(臣權)정치에 적합한 인물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자 태조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로가 컸고, 패기만만했던 다섯째 왕자 정안대군(靖安大君) 방원(芳遠 : 당시 27세)이 크게 불만을 품고 있었다. 따라서 필자는 골육상쟁의 발생 이유로, ①태조의 편애, ②정도전의 신권정치 실현욕망, ③이방원의 야심이 충돌한 결과이지 한양 도성과 경복궁의 터가 나쁜 이유는 아니라고 본다.

 

󰁱조선과 한양의 設計者 鄭道傳의 죽음

 

태조 이후 왕위를 노리던 정안대군은 왕후와 정도전을 눈에 가시로 여기던 중 1396년 신덕왕후가 왕자들에게 엄청난 화근덩어리만 남기고 죽었다.

 

당시 62세이던 태조는 사랑하는 왕비의 죽음과 어린 세자에 대한 걱정으로 깊은 병을 얻었다. 태조가 병석에 눕자 조선을 개국 할 때부터 신권 정치를 펼치려던 정도전과 야심만만한 정안대군 방원은 서로 상대방을 제거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정도전과 남은 등은 정적 방원 형제들을 제거하기로 계획하고 1398년(태조 7년) 8월 26일 태조의 병문안을 핑계로 왕자들을 경복궁에 불러 모았으나 박포의 밀고로 이를 알게 된 방원과 조준(趙浚), 김사형(金士衡) 등은 한밤중에 경복궁을 빠져나와 정도전, 남은 등 정적들을 선제공격해 죽이고, 다시 경복궁에 들어가 왕세자 방석과 그의 형 무안군 방번(芳番)을 죽였다.

 

󰁱정종의 등극과 개성 환도

 

태조는 사랑하는 신덕왕후와 사이에 낳은 세자와 왕자가 방원에게 죽자 크게 낙심하여 1399년 둘째왕자 정종에게 왕위를 양위했으며, 2대 정종은 왕위에 오르자 마자 '경복궁의 참혹한 골육상쟁은 궁궐의 터가 나쁘기 때문' 이라며 상왕 태조를 모시고 개성으로 환도(還都 : 3월 7일)했으니, 태조 3년 한양으로 천도한 날(10월 28일)부터 불과 4년 6개월 후에 벌어진 비극이었다.

 

 

 

 

 

󰁱제2차 왕자의 난(1400년)과 태종의 등극

 

 

제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박포는 논공행상에서 일등공신이 되지 못한 것을 불평하던 중, 태조의 4남 방과가 왕위 계승의 야망을 품었으나 동생 방원에게 밀리자 시기심에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알고 방간에게 접근하여,

 

 

'방원이 장차 방간을 죽이려 한다' 고 거짓 밀고 한 후 "선수(先手)로 방원을 치자"고 선동했다. 방간은 이 말을 믿고 사병들을 동원해 개성 시내에서 치열한 시가전을 벌였으나 이를 대비하고 있던 방원에게 패하여 유배당하고 박포는 처형되었다.

 

 

이로서 반대파들은 거의 소멸된 반면 방원의 정치세력은 더욱 강화되었다. 허수아비나 진배없던 정종은 '2차 왕자의 난' 이 평정된 뒤 방원의 심복인 참찬문화부사(參贊門下府事) 하륜(河崙)의 주청을 받아들여 1400년 2월 방원을 왕세자로 책봉하고, 11월 방원에게 왕위를 넘겼다.

 

 

󰁱 6년 8개월 만에 한양으로 돌아오다

 

 

정종의 개성 환도로 6년 8개월간 텅 빈 궁궐이었던 경복궁은 '밤에 호랑이가 근정전 뜰까지 들어왔다' 고 <실록>에 기록되어있듯이 '불길한 터' 로 방치되어 있었지만 태종은 개성에서 왕이 된 후 한양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굳히고 있었다.

 

 

태종은 4년(1404) 9월 9일에 '창덕궁도성제조' 를 한성에 보내어 이궁 창덕궁을 지을 터를 잡게 한 다음 그달 13일 '궁궐보수도감' 에게 경복궁 보수를 명한 후 다음해(즉위 5년)에 한양으로 환도하려하자 신하들은 다시 개성, 무악, 한성을 궁궐 터로 주장, 의견이 분분하였다.

 

 

태종은 종묘에 고(告)하고 쟁반에 돈을 던져서 점을 치게 하였는데, 개성과 무악은 각각 2흉 1길이었고 한성은 이길 일흉(二吉 一凶)의 괘가 나왔으므로 그것을 빌미로 삼아 그해 10월 11일에 환도를 단행하고, 궁궐을 보수하면서, '한성에 명당수가 없어 터가 나쁘다' 는 주장을 불식시키려고 경복궁 서쪽에 연못을 파고 금천을 파서 물을 흘려보냈으며, 48개의 돌기둥을 세운 후 2층 전각을 세웠으니 곧 경회루이다.

 

 

태종은 환도 후 창덕궁에서 거쳐하다 즉위 11년(1411) 8월 9일 경복궁에 입궁 하는 등 파란만장한 곡절 끝에 한성이 600년 수도 서울로 자리 잡게 되었다.

 

 

󰁱 터가 문재인가 사람이 문제인가

 

 

'술사' 들은 제 1차 왕자의 난이 발생된 이유로 "주산인 북악산에서 내려오는 용(龍 : 산 줄기)의 골이 깊어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고 평가하고 있으나 필자의 견해는, 이성계의 신덕왕후에 대한 대책 없는 사랑 과, 정도전과 이방원의 야망이 빚은 참사 이지 경복궁 터가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본 기고문은 김영상 著 '서울 六百年' 과 필자의 생각을 더하여 서술하였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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