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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록이 짙어지면 생각만 해도 마음이 설레는 계절이었다. 그러나 요즈음은 너무 덥다. 나이가 들어 팔순 반이 되니 괭이를 들고 산비탈 밭을 올라가니 숨이 차다. 잠시 쉬면서 문득 지난 시절과 앞으로 살아야 할 날이 어렴풋이 교차해 늙음에 대한 한심한 시 한 수가 생각났다.
“컴퓨터도 늙어 속도가 느리고 / 티브이도 늙어 화면이 흐리고 / 냉장고도 늙어 찬 기운이 없고 / 라디오도 늙어 지지직거리고 / 옷장도 늙어 삐걱거린다. / 마당의 무화과도 늙어 아래로 축 처지고 / 골목길도 늙어 울퉁불퉁 패이고 / 장독위의 고양이도 늙어 가르릉 거리고 / 뜰 앞의 개도 늙어 누가와도 보지 않는다. / 아내도 늙어 어디 성한 데가 없어 끙끙거리고 / 친구들도 늙어 패기들이 없고 / 나와 살던 모든 것이 나와 함께 늙어가다니······
내가 100까지 산다면 앞으로 10년이 남았다고 보는데 욕심이겠지!. 그러나 아침이슬처럼 잠시 살다 가는가 생각하니 더 늦기 전에 욕심 따위 버려야 할 게 없는지 꼼꼼하게 살펴보아야 하겠다는 생각이 가끔 든다.
아침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다 한낮이 되면 불볓 더위다.. 그래서 애지중지 키우던 열대식물인 덴마크 무궁화 하와이무궁화, 칸나, 꽃, 자스민, 천사의 나팔 등을 그늘 진 곳으로 옮기고 거름을 주었다. 그러자 아내가 자기보다 꽃을 더 많이 사랑하는 늙은이라 비아냥거린다. 그러면 ‘꽃은 항상 젊으니까’ 퉁명하게 말하면서도 골골거리는 아내에게 그동안 뭐 했나 생각하며 미안한 마음이 든다.
나이 여든 반이 되도록 아내나 아이들에게 시간을 많이 주지 않고 나만 홀로 마라톤 선수처럼 달려온 것 같다. 가진 재산도 없고, 권력도 없고, 똑똑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이제는 아들과 아내에게 함께 할 수 있는 게 그나마 얼마 안 남은 시간 밖에 없다. 그러나 아이들은 바쁘다고 뒤로 미루고 아내는 뒤늦은 건강체조, 요가 한다고 미룬다.
그래서 여태도 뒤돌아볼 사이 없이 혼자 바쁘게 살았으니 이제 아무리 바빠도 느릿느릿 걷고, 아무리 배고파도 느릿느릿 먹는 소처럼 살고 싶다. 시간은 돈이라는 속담과 같이 지난 삶을 뒤돌아보는 것조차 시간이 아까웠고 시간을 재산으로 여기며 살았다. 그래서 걸음도 빨리 걷고, 생각도 빨리하고, 그 생각만큼이나 말도 빨리했다.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많은 실수와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오기도 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 싶어 다짐하는 마음으로 ‘구순 그림’을 그려보았다.
새벽에 일어나 나와 누군가를 위해 간절히 염불하며, 오전엔 세상 걱정 모두 내려놓고 경전과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마음을 다스리리라. 오후엔 밭에 올라가 땀 흘리며 채소와 나무를 가꾸고 활터(弓道場)에 가서 활을 쏘며 정신과 몸을 단련하며, 궁도 동호인들을 만나 세상 이야기와 서로의 어려움과 정다운 이야기 하며 마음을 나누리라.
짬이 있으면 아들 며느리 딸 그리고 젊은이들과 어울려 지난날을 거울삼아 앞날을 이야기하고, 마음 나눌 벗을 만나 술을 한잔 나누리 리라. 시간이 나면 들과 숲에 나가 자연과 어울리며 키 작은 들꽃과 조잘거리는 새들과 이야기 나누고, 흐르는 물소리에 귀 기울이면서 하늘을 보며 마음을 넓혀 보리라.
이제 남은 세월 두 번 다시는 허둥거리며 살지는 않으리라, 무슨 일을 하든, 누굴 만나든 따뜻한 마음을 잃지 않으리라. 외로움에 지친 이들에게 서신을 보내고 좋은 책을 선물하리라. 그래서 그동안 부지런히 써 모은 글들을 책으로 내어 보시하리라 생각한다. 살다 보면 좋은 날만 있으리요. 눈물 나는 날이 허다하니 눈물 마를 날이 있으리요. 그 눈물로 메마른 세상을 흠뻑 적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러자면 마음의 눈물을 흘려야 하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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