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기고 >
[전병일 백전면 출신, 남양주신문사 회장]연산군은 왜 폐왕(廢王)이 되었나
조선 9대 임금 성종의 정비 공혜왕후가 후세가 없이 승하하자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4/12/02 [10:46]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임금의 총애를 받던 종2품 숙의 윤 씨가 왕비에 오르고 1년 만에 낳은 아들이 이융(연산군)이며 심한 투기로 폐비가 되어 사가로 쫓겨나 사사되고 아들 융이 8살에 세자에 책봉되어 19살에 임금에 자리에 오른다.

 

연산군은 생모이신 폐비 윤 씨의 묘 옆에 최고급품의 목재와 자재를 사용하여 사당을 짓고. 유명한 문필가를 시켜 효사묘(孝思廟)의 패를 쓰게 하고 달게 하였다. 또한 예조에서는 축문을 지어 올리고 효사묘를 희묘(懷墓)라고 지어 왕에게 바쳤다.

 

사헌부(司憲府)와 사간원(司諫院)에서 물 끓듯이 일어나고, 대사헌 김심이 전하 폐비 윤 씨의 묘를 회묘라 하고 효사묘를 지음은 선왕대왕의 유교(遺敎)를 거역함이요, 만고에 비추어 볼 때 예(禮)에 없는 일이라며 목숨을 내놓고 사헌들과 함께 상소를 올렸다.

 

인권이 보장된 민주화 시대인 지금의 충신들과는 다른 모습이었던 같다. 왕 연산의 분노는 하늘을 쳤고 상소는 북북 찢겨 나갔다. 이때 의정부(議政府) 우찬성(右贊成) 정문형(鄭文炯)이 김심의 말은 옳고 왕의 행위는 잘못되었다고 상소를 올렸다. 정문형은 조선 개국공신 정도전의 증손자이다. 많은 충신들이 반대를 하자, 젊은 연산은 주색에 빠지고 용포를 입은 채 궁녀를 껴안고 금침(衾枕) 속으로 들어가는 일이 연일 반복되었다. 왕의 존귀한 신분에서 벗어나 사내라는 한 동물의 수컷이 되어 거칠고 난폭하기 짝이 없는 폭군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가녀린 궁녀의 육신이 젊은 왕의 육체를 휘감고 법도도, 위엄도, 신분도, 체통도 없었을 뿐 아니라 이를 방해하는 무리도 없으니 순간은 마음을 괴롭게 한 어머니의 영상도 없었다. 오직 두 사람의 신음소리가 적막을 깨트릴 뿐이다. 폭정과 주색이 이어지자 대사헌 김심과 충신들은 더 이상 상소를 올리지도 않았다.

 

연산은 4년 동안의 치세는 선대 성종의 말기에 나타난 퇴폐풍조의 부패를 일소하기 위하여 지방에 암행어사를 파견하여 백성의 동정을 살피고 관료의 기강을 바로잡기도 했으며, 변방 지역에 안정을 꾀하면서 나라의 태평성대를 위하여 노력했다. 그러나 생모이신 폐비 윤 씨 죽음의 사정을 알게 되면서 왕 이전의 자식된 도리를 하려 하였으나 폐비의 신분이라 효심의 길이 막히게 되자 주색에서 폭군으로 변해버린 것이다.

 

법(法)과 도(道)와 예(禮)가 하늘같이 높은 천륜의 정을 갈라놓을 수밖에 없는 것이 당시의 법도(法度)다. 폐비 윤 씨의 아들이 왕위를 이어받은 연산의 아버지 성종은 조선시대 전체를 통틀어 가장 평화롭고 조정의 안정을 이룬 성종은 군자임을 자처하였으나 한편으로는 호기가 넘치는 경향이 있어 12명의 부인에 30명에 달하는 자녀를 두었는데 이중 유독 윤 씨를 총애하게 되었고, 숙의의 자리에서 최고 위치인 중전의 자리에 오르게 하였다.

 

중전 윤 씨는 질투심이 강해 성종이 다른 후궁의 방을 순회하자 후궁들을 독살할 계획이 발각되기도 하였으며, 여러 차례의 투기 정황이 드러나 빈으로 강등의 위기도 있었으나 성종의 배려로 위기를 넘기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투기는 멈추지 못하고 결국은 만백성의 어버이인 임금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내는 사건이 벌어져 왕의 분노도 컸지만 시어머니인 인수대비의 격분을 달랠 방법이 없어 조정의 세력 간에 대립을 하였으나 폐비가 되어 폐출되고, 인수대비는 몇몇 후궁들과 계책을 꾸며 왕에게 반성이 없다고 고해 연산 융이 4살 때 사약을 받아 사가에서 일생을 마감했다.

 

연산은 성장 과정에서 학문을 싫어하고 학자를 배격하고 성균관을 폐지하여 유흥장으로 만들었으며, 불교의 본산인 원각사를 없애고 기생들의 모임 장소로 이용했다.

 

세자 책봉에서 폐비의 자식이 임금이 되면 후에 화가 미친다는 인수대비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땅한 왕자가 없어 1484년 8세의 나이에 세자 책봉이 되었다. 세자 융은 성격이 거칠어 자신의 잘못에 위협적인 존재는 용서하지 않았다.

 

1494년 12월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로 조정의 우려에도 제10대 왕으로 등극을 하게 된다. 연산은 1498년 무오사화와 1504년 갑자사화를 통해 자신의 뜻을 거역하거나 대립했던 세력을 제거하기 시작하였다. 어머니 죽음에 대한 분노의 복수 칼을 휘둘러 궁궐 안을 온통 피비린내와 기생들 천지로 만들었다. 연산의 폭정은 날로 더하여 후궁 이전 자식을 둔 장녹수의 기색에 빠져 죄 없는 후궁들의 사지를 찢어 죽이고, 그들의 머리를 뽑아 전시를 하는 엽기적인 행각이 폐왕이 길을 재촉한 것이다.

 

백성들의 민심은 연산으로부터 돌아서고 박원종 등이 반정을 일으켜 임금 연산은 1506년 폐출이 되어 왕자의 신분으로 강등이 되고, 1488년 정현왕후 윤 씨에서 태어난 성종의 둘째 아들 진성대군을 11대 임금으로 옹립하였다.

 

연산은 폐비 신 씨와 수많은 후궁들이 있었으나 4남 2녀의 자식을 두었다, 연산은 1476년에 출생하여 1494년에 왕위에 오르고, 1506년 9월 반정에 의하여 폐왕이 되어 두 달 후인 11월에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31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감했다.

불의와 반칙과 무지의 승리는 순간이며, 정의와 원칙과 정도는 역사 기록이 증명하게 된다. 

트위터 페이스북 카카오톡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함양신문
 
 
광고
광고

가장 많이 읽은 기사
함양군, 새해에도 전지훈련 유치로 지역경제 활력 불어넣어 / 함양신문
함양군, 2025년 상반기 소득특화지원사업 융자 신청 접수 / 함양신문
함양군, 정보공개 종합평가 2년 연속 ’최우수 기관‘ 선정 / 함양신문
함양군, 지역인재 육성 위한 장학금 기탁 이어져 / 함양신문
함양군 재활용선별시설 재활용품 판매로 ‘1억 6천만원’ 수익 올려 / 함양신문
‘지리산함양시장으로 설맞이 장보러 오세요~’ / 함양신문
[송암 소재우] 인고(忍苦)의 열매 대추 한 알 / 함양신문
함양군, 아동위원협의회 위원 위촉식 개최 / 함양신문
함양군, 2025년 적십자 특별회비 전달 / 함양신문
유림초, 겨울방학 캠프를 운영하다 / 함양신문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