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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외함양군향우회연합회 고문 권충현]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그리고 함양 유림의 청도 자계서원 예방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4/09/23 [10:01]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재외함양군향우회연합회 고문 권 충 현 © 함양신문

 

고속도로 함양 톨게이트를 빠져나와 로터리에 이르면 ‘충효의 고장 함양’이라는 거대한 표지석과 ‘남계서원(灆溪書院)’ ‘청계서원(靑溪書院)’ 갈색 안내 표지판이 한눈에 보인다. 함양으로 들어오는 외지인에게 선비고을 함양의 정체성을 단번에 보여주는 상징적 표지물이다.

 

갈색 간판은 문화재 간판이다. 쌍으로 된 남계서원, 청계서원 갈색 간판은 고속도로 출구에만 있는 게 아니라 함양 어디를 가나 주요 도로변 곳곳에 세워져 있다. 함양을 방문하는 사람들이면 꼭 가봐야 할 만큼 가치 있고 소중한 함양의 대표적 문화재이며 많은 외지인이 그곳을 찾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함양에는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외에도 많은 서원들이 있다. 그럼에도 유독 이 두 서원 안내 표지판만 함양 전역에 세워져 있다는 것은 이 두 서원이 우리 함양으로서는 특별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치 안동에 갔을 때 어디에서나 도산서원과 하회마을 안내 표지판을 만날 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남계서원이야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서원이니 이런 대우를 받는 게 당연하지만 청계서원은 어떤 연유로 남계서원과 나란히 이런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일까?

 

보름 전에 우리 함양 유림은 박찬택 회장님의 인솔하에 대형버스 여섯 대에 나눠타고 청도에 있는 자계서원(紫溪書院)을 다녀왔다. 이 행사에는 함양향교 역대 전교님을 비롯한 함양 유림 모두가 동참했다. 집행부의 헌신과 많은 분의 찬조 그리고 전체 유림의 참가로 인해 행사가 매우 성대하게 이루어졌다. 이 거창한 행사의 목적지가 자계서원으로 잡힌 이유는 바로 청계서원 때문이었다. 자계서원은 청계서원에 모시고 있는 탁영 김일손 선생을 모신 본 서원이기 때문이다.

 

탁영 김일손 선생은 일두 정여창 선생보다 열네 살이나 어렸다. 그런데도 일두 선생과 도의지교(道義之交)로 맺어진 절친이었으며 죽어서까지 남계서원과 청계서원에 나란히 모셔져 함께 후인들의 존숭을 받고 있다. 청도 출신 탁영 선생이 함양 출신 일두 선생과 이런 관계로 맺어지게 된 것은 스승 점필재 김종직 선생 때문이었다. 점필재 선생은 관직에 있는 동안 어디에서나 가르침을 베풀어 조선조 사림 형성의 기틀이 되었다. 함양군수로 있을 때도 목민관의 주요 업무 일부로 향교에 나아가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때 배운 제자들이 일두 정여창, 남계 표연말, 뇌계 유호인, 매계 조위 등 기라성 같은 조선의 인재들이었다.

 

점필재 선생은 후에 선산부사를 지낼 때 어머니상을 당해 고향인 밀양에 내려가 시묘살이를 했다. 이때 이웃 청도에 살고 있던 열여섯살 소년 김일손(金馹孫)은 형님인 김준손(金駿孫), 김기손(金驥孫)과 함께 밀양으로 김종직 선생을 찾아가 제자가 되었다. 이렇게 탁영은 점필재 선생을 통하여 일두 선생과 동문사형제 사이가 되었다. 1482년 임인년 별시에 둘째형 김기손은 장원(壯元)으로, 큰형 김준손은 아원(亞元)으로 대과에 급제했다. 그리고 4년 후인 1486년 스물두 살의 탁영도 대과에 아원 급제하여 관직을 시작했다. 탁영은 조선시대 엘리트 관료들의 관로인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며 직언(直言)과 직필(直筆)로 고관들의 부패와 불의를 규탄했다.

 

탁영이 대과에 급제하던 해에 일두 선생은 어머니 최씨부인의 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했다. 탁영은 2년 후인 1488년 함양에 와서 일두 선생을 상문하고 돌아가 칭병 휴직하고 가을에 고향 청도에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지었다. 상을 마친 일두 선생 역시 그 해에 섬진강가에 악양정(岳陽亭)을 지어 강학과 수신을 위한 거처를 마련했으니 두 사람은 참으로 의기상통하는 사이였다고 생각된다.

 

탁영 선생은 일두 선생과 함께 이듬해(1489) 4월에 보름간 지리산을 유람했다. 이때 탁영이 쓴 지리산 유람기가 바로 그 유명한 속두류록(續頭流錄)이다. 25세의 탁영과 39세의 일두가 보름간이나 함께 유산했다는 것은 열네 살이라는 나이 차이를 초월해 두 사람이 얼마나 친히 지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두류산 유산을 마친 두 사람은 밀양으로 가서 스승인 점필재 선생을 찾아뵈었다. 이듬해인 1490년 일두 선생도 별시문과에 급제해 관직에 나아갔으며 이후 시강원설서 등을 거쳐 1496년 초 안음현감으로 부임했다. 그 사이 1492년 9월에 점필재 선생은 향년 61세로 돌아가셨다.

 

​ 스물 여섯 나이에 장원급제했던 둘째형 매헌 김기손은 점필재 선생께서 돌아가신 뒤 곧이어 서른여섯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2등으로 급제했던 큰형 동창 김준손은 이조정랑 등을 거쳐 1493년 함양군수로 부임했다. 스승인 점필재 선생이 군수로 목민 활동을 하면서 제자들에게 성리학적 이상국가 건설을 위한 큰 가르침을 베풀었던 곳도 함양이요 절친인 사형 일두 선생의 고향도 함양인데 친형이 함양군수로 왔으니 탁영 선생으로서는 함양이 정말 친숙하고 특별한 곳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서이겠지만 탁영 선생은 남계수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고 시야가 탁 트여 호연지기를 기르기 안성맞춤인 남계천변에 청계정사를 지었다. 지금 청계서원이 있는 바로 그곳이다.

 

청계정사를 지은 이듬해 봄에는 일두 선생이 바로 인근 안음현감으로 부임했다. 형님은 함양군수, 절친인 사형(師兄)은 안음현감이니 좌청룡 우백호다. 오래지 않아 탁영은 모친상을 당하여 시묘살이를 시작했다. 상이 끝난 1498년 6월 함양으로 와서 일두 선생을 만나고 청계정사에서 조섭하고 있었는데 7월 5일 그곳으로 들이닥친 의금부도사들에게 체포되어 압송되고 27일 처형되었다. 탁영 선생이 스승인 점필재 선생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에 올렸던 것이 빌미가 되어 일어난 무오사화의 시작이었다. 탁영은 거열형(車裂刑)을 당했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은 부관참시를 당했으며 점필재 선생의 문인들이었던 권오복, 권경유 등은 참수당하고 한훤당 김굉필과 일두 정여창 등은 유배를 갔다.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를 갔던 일두 선생은 1504년 그곳에서 돌아가시고 고향 인근 승안산에 반장되었으나 곧 일어난 갑자사화 때 부관참시 당하는 참화를 다시 겪었다. 탁영의 형님 김준손과 그 자녀들은 호남으로 유배를 갔다가 중종 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의금부 도사들은 탁영을 잡으러 고향인 청도로 갔으나 그때 탁영은 함양에 있었다. 함양으로 달려온 의금부도사들이 탁영 선생을 포박하여 끌고 간 곳은 바로 청계정사였다. 반세기 후에 개암 선생과 지역 유림이 남계서원을 세워 일두 선생을 모시면서 지금의 터에 자리를 잡은 것은 어쩌면 그곳이 바로 일두 선생과 탁영 선생의 우정과 피어린 역사의 현장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요 탁영 선생을 기리기 위하여 20세기에 들어서서야 세워진 늦깎이 청계서원이 지금 함양의 주요 도로 곳곳에 갈색 표지판으로 남계서원과 함께 나란히 안내되고 있는 연유일 것이다.

 

이번에 함양 유림이 방문한 자계서원은 선생이 젊은 날 운계정사(雲溪精舍)를 짓고 강학하던 곳에 세워진 서원이다. 무오사화로 참화를 당한 탁영 선생은 중종반정 후 복권되고 1518년 운계정사 옆에 선생을 기리기 위한 사당 자계사(紫溪祠)가 세워졌는데 무오사화가 일어났을 때 사흘간 핏빛 자주색[紫] 물이 운계정사 앞 내[溪]를 흘렀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자계사는 1615년에 탁영 선생의 할아버지 절효공 김극일 선생과 청도지역의 거유 삼족당 김대유 선생을 모시는 자계서원(紫溪書院)으로 확충되었으며 1661년 사액서원(賜額書院)이 되었다. 자계서원은 대원군 때 훼철되었다가 백 년 전인 1924년 복설되었다. 탁영 선생과 함께 모셔진 삼족당 김대유 선생은 탁영 선생의 장조카로 함양군수를 지낸 큰형 동창 김준손 선생의 장남이며 일두 정여창 선생의 제자다.

 

탁영 선생이 운계정사를 짓고 강학하던 곳이요 후인들이 자계사와 자계서원을 세워 선생의 절의와 기백을 기려온 이곳에는 선생이 손수 심었다는 은행나무가 수백 년 세월을 살아오면서 서늘한 바람[風]으로 푸르고 노란 빛[光]으로 고절한 선비의 혼을 전해주고 있다. 원정에 서 있는 수백 년 수령의 이 은행나무는 보는 이들을 압도할 만큼 거대했으며 두터운 용비늘 껍질은 보기에도 신령스러웠다.

 

무더운 폭서기를 지나 파란 하늘에 흰구름이 아름다운 가을 초입에 함양의 전체 유림 회원이 청도까지 달려가 자계서원을 예방한 것은 조선 유학사에 아로새겨진 탁영 선생의 절의와 기백 그리고 남계서원 및 청계서원과의 관련성 때문이었다. 행사를 진행한 집행부에서는 자계서원에 더하여 새마을 운동 발상지, 운문사, 청도박물관 등을 두루 둘러볼 수 있는 일정과 코스를 마련해 함양 유림의 역사적·문화적 시야를 넓혀 주었다. 멋진 코스를 개발하고 성공적으로 행사를 추진해 주신 함양군 유림 지도부와 각 면 집행부의 노고와 추진력에 감사와 경의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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