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랑이굴에서 평정을 일으키고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 김영삼은 대통령이 되다
※문민정부 탄생 30주년을 5회로 계획하였으나 기사사정이 여의치 않아 8회로 연장하게 됨을 독자들의 양해를 바라면서
호랑이굴에 뛰어든 김영삼은 민주화투쟁 당시보다도 더 험난하고 복잡한 시련과 마주하게 되었다. 김영삼 특유의 정면승부 근성 발휘로 권력의 맛에 세련되고 익숙한 절대 다수의 민정·공화계의 분계선을 넘어 66.6%의 압도적 지지로 민주자유당의 대통령후보 지명전이라는 3당 합당과 함께 2부 능선을 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후보로 결정된 이후 한파가 몰아치기 시작했다.
김영삼 차단을 위한 당내 기류가 흘러 당원들과는 달리 권력에 세습되어 있는 중진들이 이탈을 하게 되었고, 경선을 한 이종찬 마저 당을 만들어 대선출마를 하였다가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과 연대를 하고 여기에 많은 인사들이 참여했다. 심지어는 민주화투쟁을 함께했던 박찬종까지 가세를 하였으나 천하지대본(天下之大本) 김영삼에 대한 민심은 흔들리지 않아 1992년 12월 18일 대통령선거에서 김영삼 9,977,332표, 김대중 8,041,294표, 정주영 3,880,067표, 박찬종 1,516,047표로 김영삼은 김대중을 1,936,038표차라는 압도적 승리를 거두고 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에 당선이 되었다. 동지며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은 국민들에게 눈물을 흘리며 정계은퇴 선언을 하고 외국으로 떠났다.
김영삼의 당선에는 쿠데타와 계엄령, 또 쿠데타로 이어지면서 인권 유린과 정치적 탄압의 독재 권력과 맞서 투쟁한 승리의 결과이다.
김영삼은 제14대 대통령에 취임하여 변화와 개혁의 시대를 열다.
김영삼 대통령의 최대 수혜자는 김대중
1993년 2월 25일 영하15도의 강추위에 김영삼은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멸치 잡아 평생뒷바라지를 한 아버지 김홍조 옹의 내외분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통령 취임선서를 하자, 민주화운동에 오랜 세월 동고동락을 함께한 동지들도 감격의 눈물을 흘리면서 부디 성공한 대통령으로 역사인이 되기를 기원했다.
취임사가 진행되는 동안 식장에서 나오는 함성은 민주화를 외치면서 광화문거리를 행진하던 그때의 모습이었다. 전 세계의 인류들이 대한민국 문민정부 탄생을 축하하였으나 패배를 인정한 김대중과 민주당은 취임식과 축하연에 한 사람도 참석하지 않은 것으로 전해졌다. 그러나 김영삼의 3당 합당과 대통령 당선에 가장 큰 수혜자는 김대중이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싶다.
김영삼은 취임 시작부터 전임 대통령과는 모든 것이 달랐다. 먼저 대통령집무실에 있던 대형 금고를 철거했다. 그리고 대부분의 점심 메뉴는 칼국수였으며, 청와대 앞길과 인왕산을 개방하고, 정경유착과 금권선거를 척결하고, 부정부패와의 전쟁선포, 군 개혁과 안기부 대폭개편, 안가철거 등 부조리하고 권위적인 유산은 모두 제거하도록 지시를 내리면서 신한국창조를 선언하고 개혁을 이어 나가자 김영삼의 국민지지는 92%로 현재까지 어느 대통령도 근접하지 못하는 가록을 가지고 있다.
혁명적 정치개혁 역사적으로 당연히 높은 평가받아야
개혁은 곧 고위공직자나 재벌, 기득권 세력들의 불만으로
지지도 하락에 원인이 되어 그 잔재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어
김영삼 대통령은 역사의 기록에 영원히 남을 수 있는 혁명 수준의 정치개혁을 펼쳐나갔다.
첫째, 고위공직자 재산공개다.
대통령 본인을 비롯하여 고위공직자 재산을 공개하여 부정부패 척결을 시작했다. 심지어는 어느 국회의원은 6살 손자명의로 몇 십억 원대의 빌딩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부정과 부패, 비리혐의가 드러나 의원직 사퇴와 탈당·제명의 국회의원이 있었으며, 그 후 모든 공직자의 재산공개를 하도록 의무화하였다. 심지어는 공직선거후보자도 재산형성 과정과 전과 공개를 하여 윤리 도덕의 선명성을 국민들에게 알리도록 했다. 여기서부터 공직자들의 불만이 시작으로 지지도 하락에 단초가 된다.
둘째, 금융실명제 선포다.
유신선포나 계엄령선포는 권력 보호조치였다면 금융실명제와 부동산실명제는 부정부패를 차단하는 획기적이고 혁명적 선언으로 우리 역사에 길이 보전되어야 할 업적이다. 당시 실명제가 제도화되고 실시되자 권력, 재벌, 기득권 세력들의 어두운 손들의 비밀 지하금융이 어렵게 되자 보이지 않는 저항이 이루 말할 수 없었으며, 저소득층까지 무엇인지 이해도 하기 전 기득권 세력에 편승이 되어 여론 조성에 동참이 되는 현실이었다. 이로써 김영삼의 국정지지도는 두 번째 하락의 원인이 된다.
셋째, 역사바로세우기다.
광화문 조선총독부철거, 4.19혁명과 5.16쿠데타, 12.12전두환신군부의 하극상,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재평가다. 5.16쿠데타 이후 4.19혁명을 의거에서 다시 혁명으로, 5.16혁명에서 쿠데타로, 12,12사건을 역모반란으로, 5.18을 민주화운동의 기념으로 규정을 하고, 군 본연의 임무를 이탈하여 권력을 휘두른 「하나회」와 정치군인들의 숙청도 단행하자 여기 역시 많은 불만 세력과 동조자들이 합세를 하여 지지하락에 가세를 하게 되었다.
넷째, 정치개혁이다.
9선의 국회의원과 네 번의 야당총재 40년의 정치경륜을 통하여 얻은 경험으로 정치개혁을 시작했다. 유사부처 통합을 단행한 후 과열과 부정한 방법의 혼탁선거, 금권선거 등 부정선거를 영원히 추방하기 위한 법을 제도화했다. 인구 비례에 의한 선거자금 사용의 상한 100만 원 이상 벌금형이면 당선 무효와 선거자금 보전 등 공직선거의 공영화제도로 실시한 것은 대단한 혁명적이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아쉬웠던 남북정상회담이다.
우리 땅에서 전쟁은 안 된다며 1994년 6월 남북정상회담을 추진하여 양측 대표자회의가 열리고, 김영삼, 김일성 양김 정상회담에 합의하여 7월에 정상회담 일정이 확정되었으나 정상회담 15일전 1994년 7월 8일 새벽 1시 김일성이 심근경색으로 급사하여 남북정상회담은 무산이 되고, 기대에 부풀었던 국민들은 많은 아쉬움을 가지게 되었다. 당시 1·2.차 정상회담을 하기로 하였는데 김일성이 사망하지 않았다면 김일성이 먼저 제안을 한 것이라 남북 간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라 전문가들은 예상을 했다.
(다음호는 김영삼의 재임시절 오해의 문제들이 왜 인가?와 김대중이 왜 수혜자인가를 기고하고 마감할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