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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현 출향인의 고향그리기] ‘고운(孤雲) 최치원(성리학의 유산)’을 읽고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2/01/28 [15:14]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연합회 고문  © 함양신문

함양신문 2022년 1월 17일자 ‘고운(孤雲) 최치원(성리학의 유산)’이라는 칼럼을 읽고 이 글을 쓴다. 누군가의 글을 읽고 관련된 내용으로 글을 쓴다는 것은 참 조심스럽고 주저되는 일이다. 하지만 필자가 글의 말미에 ‘고장의 역사와 인물을 바르게 인식하여 행동하는 것은 후손·후학들의 사명이며 도리’라고 쓰셨기에 이 칼럼을 읽은 사람이 혹시라도 고장의 역사와 인물에 대해 바르지 않은 인식을 하지 않도록 몇 가지 사안에 대한 필자의 의견을 조심스레 개진(開陳)하고자 한다.

 

먼저 ‘성리학의 발달 단계는 함양의 태수로 부임한 고운(孤雲) 선생의 대민사업에서 기원을 찾는다’는 첫 문장은 독자에게 성리학의 기원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심어줄 우려가 있다.

 

성리학(性理學)의 기초를 닦은 사람은 염계(濂溪) 주돈이(周敦頤, 1017~1073) 선생이었다. 그의 사상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사람은 이정자(二程子)로 불리는 정호(程顥, 1032~1085), 정이(程頤, 1033~1107) 형제였으며 그들의 사상을 집대성하여 성리학 체계를 완성한 이는 주자(朱子, 1130~1200)였다.

 

성리학은 송대(宋代)에 이르러 한·당대의 훈고학적 유학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태극론, 이기론, 심성론 등의 철학적 사유를 도입하고 그 속에서 바람직한 인간의 존재 양식과 참된 삶의 도리(道理)를 찾아 실천궁행(實踐躬行) 할 것을 강조한 새로운 유학이었다. 인간을 포함한 우주 만물의 본성과 이치를 궁리한 학문이라 하여 성리학(性理學), 새로운 유학이라 하여 신유학(新儒學, Neo-Confucianism), 송대의 학문이라 하여 송학(宋學), 도리를 궁구하고 실천을 강조한 학문이라 하여 도학(道學), 이학(理學), 체계화한 학자들의 성이나 이름을 따서 정주학(程朱學), 주자학(朱子學)이라는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렸다.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사람은 안향(安珦, 1243~1306)이다. 안향은 47세였던 1289년 말 충렬왕과 왕후를 호종하여 원나라에 갔다가 주자서(朱子書)를 손수 베끼고 공자와 주자의 화상을 그려서 이듬해 봄에 돌아왔다. 그 이후 안향은 14세기 초인 1306년 64세로 돌아가실 가실 때까지 성리학의 교육과 진흥을 위해 노력했다.

 

그런데 고운 최치원 선생은 어느 때 사람인가. 고운 선생이 태어난 해는 857년으로 분명히 기록되어 있으나 돌아가신 해는 언제였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52세였던 908년에 쓴 글이 있으니 그때까지는 살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운 최치원 선생은 9세기 중반부터 10세기 초반까지 사신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요컨대 성리학을 구축한 송나라의 학자들도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들여온 사람도 최치원 선생보다는 수백 년 후세의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성리학의 발달 단계는 함양태수로 부임한 고운 선생의 대민사업에서 기원을 찾는다’는 말은 그냥 흘려들어야 할 것이다.

 

당곡 정희보 선생을 이야기하면서 “서당을 설립하여 영호남 인재들에게 청렴과 절개, 경의 사상 기초를 남명에게 전수(사후인계)하여 그의 제자들은 임란의 구국 의병으로 참여한 홍의장군 곽재우를 비롯하여 영남 유학의 마지막 대표자 정인홍을 수제자로 길러 성리학을 계승했다.”고 기술했는데 이 진술은 주술관계(主述關係)가 불분명한 비문(非文)이다.

 

그래서 이 글을 읽은 사람은 곽재우나 정인홍이 모두 당곡 정희보 선생의 제자였다고 오해를 했을 수도 있으며 심지어는 남명까지도 당곡의 제자로 생각한 사람도 있을 것이다. 당곡 정희보 선생의 제자 중에는 선생 사후 남명 조식 선생의 문하로 옮겨 가서 계속 공부한 이들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나 남명 선생은 물론 곽재우나 정인홍은 당곡 선생의 제자가 아니었다. 또한 ‘영남유학의 마지막 대표자 정인홍’이라는 평가에도 수긍할 수 없다. 영남에는 정인홍 이후에도 기라성 같은 유학자들이 연면히 배출되었다. 조선 인재의 반이 영남에서 나온다지 않았던가.

 

“남명과 퇴계는 동시대의 학자로 임란의 혼란 속에 제자를 길러, 후세의 존경을 받는다. 퇴계 선생의 이론유학은 학문적 기둥이 되었으며 남명의 실천유학은 나라를 구하는 의병과 구국의 활동으로 이어져 유학의 정신을 빛낸다.”는 진술에도 몇 가지 오해의 소지가 있다. 첫째, 퇴계와 남명 두 분은 1501년생 동갑으로 1570년과 1572년에 각각 돌아가셨으니 ‘임란의 혼란 속에 제자를 길렀다’는 것은 잘못된 진술이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는데 20여 년 전에 돌아가신 어른들이 전란 중에 어떻게 제자를 기를 수 있었겠는가. 둘째, 퇴계 선생 유학을 이론유학으로, 남명 선생의 유학을 실천유학으로 구분하였으나 성리학은 학문 자체가 실천을 가장 중시한 학문이었으니 이러한 구분은 무의미하다.

 

퇴계 선생께서 백운동서원[지금의 소수서원] 강당에 써 붙인 백록동규(白鹿洞規)는 그 이후 설립된 거의 모든 서원의 강당에 걸려 서원 교육의 기본지침서 역할을 해왔다. 퇴계 선생 사후에 건립되어 우리나라 서원 교육에 가장 심대한 영향을 미친 도산서원(陶山書院) 전교당(典敎堂)에도 백록동규는 걸려 있다. 백록동규에는 박학(博學)-심문(審問)-신사(愼思)-명변(明辨)-독행(篤行)을 학문하는 순서[學問之序]로 명시하고 있다. 널리 배우고, 궁금한 것은 자세하게 묻고, 신중하게 깊이 생각하고, 분명하게 판별하여 독실히 실천하는 것이 학문하는 순서이니 꼭 지키라는 지침이다. 이 지침은 아무리 학문이 넓고 깊어도 독실하게 실천하지 않으면 미완(未完)의 학문이 되고 만다는 선언인 셈이다. 학문하는 마지막 단계를 독실한 실천이라고 규정하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날까지 퇴계 선생을 우리나라 최고의 성리학자로 존숭하는 이유는 학문이 높아서만이 아니다. 배움을 지극 정성으로 실천하셨기 때문이다. 자신을 낮추고 주변 사람들을 먼저 생각하며 섬겼기 때문이다. 지행합일(知行合一)의 삶이 성리학자들의 진정한 학문과 삶의 자세였다. 그랬기에 성리학을 공부하는 참된 선비들은 의(義)를 위하여 목숨까지도 기꺼이 던졌다. 사생취의(捨生取義)로 표현되는 삶의 자세다. 퇴계는 조선 성리학의 대표적 학자였으니 그의 학문은 단순한 이론유학이 아니라 이론을 바탕으로 한 실천유학이었다.

 

남명의 제자인 홍의장군 곽재우의 의병 활동이 하도 두드러져 남명의 제자들만 의병 활동을 한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으나 필자는 임란의병사(壬亂義兵史)를 연구한 학자에게서 퇴계 문하에서 많은 의병장이 나왔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임진란이 일어났을 때 우리 함양(咸陽)의 학사루(學士樓)에서 역사적인 초유일도사민문(招諭一道士民文)을 지어 최초로 의병 활동에 불을 지핀 사람도, 관군과의 갈등으로 어려움에 봉착한 의병장 곽재우 장군을 성원하여 계속 싸울 수 있게 만든 사람도 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학봉 김성일(金誠一)이요, 영의정과 병조판서로서 전란의 제일선을 지켰던 이도 퇴계 선생의 제자였던 서애 류성룡(柳成龍)이었다.

 

이들 외에도 퇴계 선생의 많은 제자들이 전란 중에 의병장으로서 사생취의의 가르침을 온몸으로 실천했으며 일제 침략기에는 향산 이만도(李晩燾) 선생이나 이육사(李陸史) 같은 퇴계의 많은 후손들이 목숨을 걸고 항일 활동을 전개했으니 퇴계의 학문을 이론유학(理論儒學)으로 남명의 학문을 실천유학(實踐儒學)으로 구분하는 것은 단견(短見)이다.

 

”청백리의 고장으로 이름난 선현들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이조판서 허주, 우의정 허목이 청백리로 알려져 있으며...”라는 주장은 지곡면 정취마을의 허씨 문중 서원인 정산서원에 배향되어 있는 어른들을 말하는 것일 터인데 이들을 우리 고장 함양의 선현으로 말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청백리로 녹선된 어른들이었느냐 하는 데는 의문이 든다. 조선조 청백리 명단에는 이 어른들의 이름이 보이지 않으니 하는 말이다.

 

“이조판서 노진, 이조판서 이후백, 이조판서 양관 3분 청백리의 상패가 공직의 거울이 되어 좁은 서당에 가득찬다”는 진술은 앞뒤 문맥으로 보아 정희보 선생의 당곡서당 이야기인데 거기서 공부한 사람은 양관 대감이 아니라 그의 손자인 구졸암 양희 선생이었다. 구졸암은 청백한 관리였으나 청백리로 녹선된 사람은 아니었다. 당곡서당 제자로서 청백리로 녹선된 사람은 노진과 이후백 두 사람이다.

 

“판서 노진, 판서 이후백, 좌승지 남계 임희무 세분을 탄생시킨 삼괴당 권시민공은 자녀교육에 성공한 자랑스런 교육자이며....”라는 진술에서는 이들이 모두 삼괴당 권시민(權時敏) 공의 외손자인 것처럼 인식될 수 있으나 이후백은 삼괴당의 외손자들과 당곡서당에서 동문수학한 사이이긴 하나 혈연으로는 무관한 사람이었다. 청련 이후백 선생은 나주임씨 임종의(林宗義) 공의 외손자였다. 삼괴당 선생의 외손자는 이조판서 옥계 노진, 찰방을 지내고 남계서원 원장을 지낸 사암 노관, 옥천군수와 장예원 판사를 지낸 완계 김희년, 광풍루 시비(詩碑)의 주인 화계 김덕년, 5읍 수령을 지낸 남계 임희무, 동계 정온의 이모부인 임희수 등 모두 매우 뛰어난 인재들이었으니 자녀교육에 성공한 자랑스러운 교육자였다는 평가나 그 따님들이 모두 하나 같이 사임당처럼 자녀들을 훌륭히 잘 길렀다는 평가는 합당한 것으로 생각된다.

 

다른 필자의 글에 대하여 이런 글을 쓰는 것은 참으로 조심스럽고 주저되는 일이지만 그 글을 읽은 사람들이 혹여 잘못된 인식을 하면 어쩌나 하는 노파심에서 이번 글을 쓰게 되었다. ‘고장의 역사와 인물을 바르게 인식하는 것이 후손·후학들의 사명이며 도리’라는 필자의 마무리 말씀에 힘을 얻어 주저하는 마음을 털고 이 글을 썼다. 독자 제현의 질책은 겸허히 받아들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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