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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현 출향인의 고향 그리기] 보통사람 점필재 김종직 선생을 찾아서(1)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1/12/06 [10:09]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연합회 고문  © 함양신문

우리 함양의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최치원, 김종직, 정여창 세 분이다. 상림이 함양인의 힐링 공간, 레저 공간으로 활용도가 높아지고 산삼엑스포의 메인 무대가 되면서 고운 최치원 선생은 자연스레 우리에게 더욱 가깝게 다가왔으며 한국의 9개 서원이 세계인류문화유산으로 지정되면서 일두 정여창 선생이 그 이전보다 훨씬 더 강력한 힘으로 우리 함양인의 자부심이 되고 있다. 상림과 연계된 고운 선생이나 남계서원과 연계된 일두 선생과는 달리 점필재 선생의 존재는 대체로 우리들의 관념 속에서 그 존재가 유지되고 있다.

 

점필재 김종직 선생에 대한 우리 함양인들의 관념은 대충 두 가지로 귀결된다. 첫째, 군수로 부임하여 공다(貢茶) 문제로 인한 군민들의 어려움을 파악하고 관영 차밭을 만들어 해결한 위민(爲民) 애민(愛民)의 목민관(牧民官)이었다. 둘째, 군수로 있으면서 일두 정여창, 한훤당 김굉필, 매계 조위, 남계 표연말, 뇌계 유호인 등 기라성 같은 인재를 길러낸 시대의 스승이요 사림(士林)의 종장(宗匠)으로 선비고을 함양의 견결한 토대를 닦은 위대한 스승이었다. 사화(士禍, 史禍)와 관련된 야사(野史) 내지는 전설(傳說) 수준도 있긴 하지만 선생에 대한 함양인들의 생각은 대체로 ‘훌륭한 목민관’, ‘위대한 스승’ 두 가지로 집약된다.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선생은 조선유교연원(朝鮮儒敎淵源)에서 포은 이후 조선 이학(理學)의 적통(嫡統)을 포은 정몽주-야은 길재-강호 김숙자-점필재 김종직-한훤당 김굉필-정암 조광조로 정리하고 있다. 점필재 선생은 조선조 성리학의 적통을 계승한 정통 계승자였다. 이에 더하여 애민 위민의 목민활동과 제자 교육을 통해 이 땅에 성리학적 이상세계를 구축하고자 했던 시대의 스승이었기에 선생에 대한 우리 함양인들의 존숭은 예로부터 특별했다.

 

그러다 보니 선생은 우리 같은 범인들과는 다른 비범한 인물로 감히 범접하기 어려운 선현으로 인식되고 있다. 일두 정여창 선생만 해도 그러한데 그의 스승이며 한훤당, 정암 같은 문묘 배향 선현의 사부(師父)요 사조(師祖)이시니 당연한 경외감이요 거리감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김종직 선생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요, 누군가의 형제이며 누군가의 남편이요 누군가의 아버지였을 것이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선현으로서가 아니라 사람 냄새 나는 보통사람으로서의 인간 김종직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김종직 선생 역시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선생은 선산김씨(善山金氏)로 강호(江湖) 김숙자(金叔滋, 1389~1456) 선생과 어머니 밀양박씨(密陽朴氏, 1400~1479) 사이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 강호 선생은 첫 부인 곡산한씨(谷山韓氏)와 결혼하여 1남 2녀를 낳고 사별했으며 두 번째 부인 박씨부인을 맞아 3남 2녀를 낳았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재혼하면서 처향인 밀양으로 이거하여 선생은 밀양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며 사후 유택(幽宅)도 그곳에 있게 되었다. 태어났을 때 아버지는 43세, 어머니는 32세였다.

 

선생은 여섯 살 때 아버지께 동몽수지(童蒙須知)를 배우는 것으로부터 학문을 시작했다. 그후 늘 아버지의 임지를 따라다니며 부친께 공부를 했다. 아홉 살 때 선산향교 교수관으로 부임하자 따라가 소학을, 열두 살 때 고령현감으로 가자 따라가 삼 년 동안 주역을, 열다섯 살에 남학 교수관(南學 敎授官)으로 부임하자 서울로 가서 삼 년간 아버지의 가르침과 성균관 공부를 했다. 19세 때는 개령현감(開寧縣監), 25세 때는 성주 교수로 부임한 아버지를 따라가 배웠다. 성주에서의 배움이 아버지와 함께 한 마지막 배움이었다. 아버지는 이듬해 정월 향년 68세로 영면하셨다. 선생은 형님들과 함께 삼 년간 여묘살이를 했으며 이때 아버지를 그린 이준록(彝尊錄)을 저술했다. 선생 형제들의 효행은 훗날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실렸다.

 

어머니 밀양박씨는 선생이 선산부사로 있을 때 돌아가셨다. 향년 80세였다. 선생은 함양군수로 나올 때도, 선산부사로 나올 때도 명분은 연로한 어머니를 모시기 위해서라고 했다. 사실은 유교적 이상사회를 지향하며 새로운 세상을 요구하는 젊은 지성들의 정신적 지주였기에 받아야 했던 선생에 대한 훈구대신들의 핍박과 외력 때문이었다. 이후 삼 년간 선생은 밀양에서 여묘살이를 했다.

 

김종직 선생 역시 누군가의 형제자매였다. 선생은 강호 선생의 5남 3녀 8남매의 막내였다. 큰어머니 소생인 장형(長兄) 종보(宗輔)는 선생보다 스무 살이나 연상이었다. 장형은 선생이 태어난 바로 다음 해에 조카를 낳았으니 아버지뻘이나 되는 형님이었다. 이복 남매들은 교감하며 함께 자랄 수 있는 동배가 아니었을 것이다.

 

선생과 함께 자란 형제자매는 밀양박씨 소생의 형님 두 분과 누님 두 분이었다. 동복의 큰형 종석(宗碩)은 선생보다 8년 연상이요 작은형 종유(宗裕)는 2년 연상이었다. 터울로 보아 누님 두 분이 그 사이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종석, 종유, 종직 3형제는 아버지를 따라 다니며 함께 공부를 했으나 때로는 따로 하기도 했던 모양이다. 선생이 함양군수로 있을 때 병조판서였던 강희맹 대감이 유림면 국계에 내려와 여묘살이를 했는데 그때 김종직 선생과 창수(唱酬)한 글 중에 자기 형제와 선생의 형님이 함께 절에서 공부할 때 어린 김종직이 찾아와 연못을 돌며 놀았던 추억을 기술하고 둘 다 형님을 잃은 것을 마음 아파하는 내용이 있으니 하는 말이다. 강희맹 대감이 여묘살이를 한 것은 1474년부터 1476년까지였는데 1460년 38세로 서거한 김종직의 형님 김종석과 1464년에 48세로 서거한 형님 강희안에 대한 추억이었을 것이다.

 

큰형 김종석(金宗碩)은 34세 때 아버지 임종 직전에 문과에 급제하고 시묘살이 후 관직에 나갔으나 38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과거에 급제하고 내려올 때 부친이 돌아가셨는데 강호 선생은 자신의 3자이면서 둘째 부인 밀양박씨의 장자인 종석을 사자(嗣子)로 지명했다. 그의 자손들은 거창군 가조면, 남상면 일원에 많이 살고 있는데 그런 연유에서인지 남상면 전척리 황강변에는 포은, 야은, 강호, 점필재, 한훤당, 일두, 정암 7현을 모시는 일원정(一源亭)과 강호 김숙자 선생의 신도비가 있다. 신도비는 묘 옆이나 묘에 이르는 길목에 세우는 것인데 강호 선생의 묘소는 밀양에 있으니 신도비만 별도로 세워져 있는 셈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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