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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현 출향인의 고향 그리기] 함양에 남아 있는 세종 12왕자 한남군의 흔적을 찾아서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1/03/02 [10:50]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 연합회 회장     © 함양신문

함양의 자랑 천년의 숲 상림에 가면 세종 왕자 한남군 묘역 안내 표지판이 서 있다. 상림에 그렇게 많이 갔으면서도 나는 한 번도 한남군 묘역을 참배한 적이 없었다. 가까이 보이는 언덕 위의 묘지가 한남군의 묘지려니 생각만 하고 늘 숲과 연꽃만 즐기다 내려왔다.

 

이번 설에는 고향을 찾은 김에 한남군의 발자취를 더듬어보기로 했다. 먼저 상림의 한남군 묘역을 찾아 나섰다. 안내 표지판을 따라갔더니 정수장이 앞을 가로막았다. 잘못 왔다는 생각에 되돌아 나와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한남군 무덤이려니 생각해 왔던 주차장 북쪽 언덕 위의 무덤을 향해 올라갔다. 멀리서 볼 때 하나의 큰 무덤으로 보였던 그곳에는 도석균 선생의 가족묘, 사진작가 청파 이진수 선생의 묘, 함양박씨 문원공파 추모 가족 유해공원, 전주이씨 영흥대군파 가족묘원 등이 있는 묘지군이었다. 그곳에 한남군의 묘는 없었다. 주차장으로 내려와 다시 표지판 안내대로 정수장 입구까지 가서 담장을 따라 좁은 길로 돌아 들어갔더니 뒤쪽에 한남군 묘지가 숨어 있었다. 안내 표지판을 보완할 필요가 있다.

 

한남군(漢南君)의 휘(諱)는 어(王於)요자(字)는 군옥(君玉)이며 시호는 정도공(貞悼公)으로 세종 기유년(己酉年) 1429년 8월 14일생이며 세종대왕의 12번째 아들이었다. 성군(聖君) 세종대왕은 소헌왕후(昭憲王后) 청송심씨(靑松沈氏) 소생 8남 2녀, 영빈강씨(令嬪姜氏) 소생 1남, 신빈김씨(愼嬪金氏) 소생 7남, 혜빈양씨(惠嬪楊氏) 소생 3남, 숙원이씨(淑媛李氏) 소생 1녀, 상침송씨(尙寢宋氏) 소생 1녀, 총 19남 4녀를 두었다. 정궁(正宮)인 왕비의 아들은 대군(大君)이요 딸은 공주(公主)이며 후궁(後宮)의 아들은 군(君)이요 딸은 옹주(翁主)다. 보통은 신빈김씨의 소생이 6남으로 이야기되면서 22남매를 둔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성주(星州)에 있는 세종왕자태실(世宗大王子胎室)에는 신빈김씨 소생으로 군호(君號)도, 졸년(卒年)도 없는 아들의 태실이 하나 더 있다. 어려서 죽었기에 통상 22남매로 이야기되는 것 같다. 많은 아들 중 첫째 아들이 문종(文宗)이요 둘째 아들이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조카 단종(端宗)의 왕위를 찬탈해 왕이 된 세조(世祖)다.

 

세종의 큰아들 문종은 재위 2년 3개월 만에 죽고 아들 단종은 1452년 겨우 열두 살 어린 나이로 보위에 올랐다. 이때 수양대군은 혈기방장한 36세였다. 문종은 죽기 전에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좌의정 남지(南智), 우의정 김종서(金宗瑞) 등에게 왕세자가 등극했을 때 잘 보필할 것을 부탁하고 죽었다. 단종 즉위년에 남지가 병으로 사직한 후 김종서가 좌의정, 정분(鄭苯)이 우의정을 맡아 신왕(新王)을 보필했다. 수양대군은 이듬해인 1453년 김종서, 황보인 등 고명대신(顧命大臣)을 죽이고 경쟁자였던 친동생 안평대군(安平大君)까지 그들과 역적모의를 했다며 강화도로 유배 보냈다가 사사(賜死)했다. 소위 계유정난(癸酉靖難)이다. 계유정난으로 군국(軍國)의 전권을 장악한 수양대군은 2년 뒤 1455년 윤6월 야반(夜半)에 단종에게 손위(遜位)를 강요하여 왕권을 탈취했다.

 

수양의 무리들이 단종에게 국새(國璽)를 내놓도록 요구하자 한남군의 어머니 혜빈양씨는 “옥새는 국가의 중보(重寶)라 선왕께서 유훈(遺訓)으로 세자, 세손이 아니면 전하지 말라 하셨으니 내 비록 죽을지라도 내어줄 수 없다.”고 항거하다 죽임을 당했다. 한남군의 어머니 혜빈양씨가 수양의 왕위찬탈에 그렇게 저항한 것은 단종을 자신이 키웠기 때문이었다. 단종의 어머니 현덕왕후(顯德王后) 안동권씨(安東權氏)는 세자빈이었던 1441년 아들 단종을 낳고 이튿날 죽었다. 그러자 세종대왕은 안온한 성격의 후궁 혜빈양씨에게 동궁의 양육을 맡겼으며 혜빈은 정성껏 돌봐 동궁이 단종으로 등극하자 문혜대빈(文惠大嬪)으로 예우를 받았던 사람이기에 단종을 지키기 위해 저항했고 그 아들인 한남군(漢南君), 수춘군(壽春君), 영풍군(永豐君) 세 사람은 모두 수양대군에게 화(禍)를 당했다. 상림의 한남군 신도비문에 보면 동생 영풍군은 세조가 왕위를 찬탈하던 그때 운검차비(雲劍差備)로 임금을 호위하다 어머니와 함께 피살당한 것으로 나오고 있으나 성주에 있는 세종대왕자태실의 영풍군 졸년(卒年)은 1457년으로 되어 있으니 이유를 모르겠다. 한남군의 바로 동생 수춘군은 그 이전에 단식으로 이미 순절(殉節)했으며 한남군은 1455년 윤6월 가산을 적몰(籍沒)당하고 금산(錦山)으로 유배당했다가 곧 아산(牙山)으로, 양지(陽智)로 이배(移配)되고 이듬해인 1456년 2월 27일 함양으로 다시 이배되었다.

 

1456년 7월 성삼문 등 사육신이 단종 복위를 도모하다가 처형당하고 상왕이었던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영월로 유배되었다. 이듬해인 1457년 시월에는 순흥에 유배되어 있던 금성대군(錦城大君)과 순흥군수[知順興郡事]로 있던 이보흠(李甫欽)이 단종 복위를 모의하다가 모두 사사되었다. 이보흠은 세종 때 함양군수[知咸陽郡事]를 지낸 사람이었다. 금성대군의 거사 실패 후 노산군에서 서인(庶人)으로 강등된 단종은 자살을 강요당하여 죽고 말았다. 열일곱 살 어린 나이였다. 한남군은 금성대군의 거사 모의에 함께 하였다 하여 11월 초 새우섬 적소(謫所)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고 종친록(宗親錄)에서 삭제되었으며 직첩(職牒)이 회수되었다. 그리고 1년 7개월 뒤 1459년 5월 29일 한남군은 31세의 젊은 나이로 적소에서 죽고 말았다. 함양으로 귀양 온 지 3년 2개월 만이었다. 기록에 따라 병사(病死), 아사(餓死), 사사(賜死)로 달리 나오니 정확한 사인은 모르겠으나 비극적 최후였음에 틀림없다.

 

한남군은 부인 안동권씨(安東權氏)와의 사이에서 중생(衆生)이라는 아들을 남겼다. 아들은 화가 두려워 숨어 살면서 옥근(玉根)과 숙근(淑根) 두 아들을 낳아 기르고 그 아들의 아들이 다시 손을 퍼뜨려 오늘날 한남군의 후예가 되었다. 훗날 중종 때 그 자손들을 선원록(璿源錄-왕실의 족보)에 환원하고 서용(敍用-죄를 지어 면관되었던 사람을 다시 등용함)케 했으며 명종 때 한남군의 군호(君號)가 추복(追復)되고 부인 안동권씨는 안동군부인(安東郡婦人), 아들 중생은 흥안군(興安君)이 되었다. 영조 때 한남군에게는 정도(貞悼)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정조 때 어머니 혜빈양씨에게 민정(愍貞)이란 시호가 내려지고 임금이 제문을 지어 관리와 제물을 보내 제를 모시는 치제(致祭)가 이루어졌다. 완전한 복권(復權)이 이루어지는데 약 200년의 세월이 걸린 셈이다.

 

휴천면 한남마을은 마을 이름 자체가 한남군의 군호에서 유래되었다. 한남군의 적소였던 새우섬은 엄천강 가운데 있는 작은 섬이었는데 1936년 병자년 홍수로 없어져 버렸다고 한다. 한남마을 건너편 강변에는 한남군이 노닐던 한오대(漢鰲臺)가 있으며 그 위에 한남군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세운 한오정(漢鰲亭)이 있었는데 정자 역시 홍수 때 없어졌다고 한다.

 

수백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한남군의 흔적이 대부분 사라져버렸지만 새우섬의 흔적과 한오대라는 글자는 남아 있다기에 묘소를 참배한 다음 그 흔적을 찾아 산을 넘고 길을 돌아 한남마을로 달려갔다. 마을에는 코로나와 추위 때문인지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을 만나지는 못했지만 강변에 수령 수백 년은 족히 되어 보이는 소나무들이 서 있고 그 속에 금줄이 쳐진 석탑(石塔)과 제단(祭壇)이 있기에 제대로 찾아왔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주변을 살펴보니 마을 앞 다리 건너편 강 속의 커다란 바위가 범상치 않아 곧장 거기로 갔다. 바위에 올라 살펴보았으나 정자의 흔적도 글자도 찾지를 못했다. 할 수 없이 개암 강익(姜翼) 선생 산소를 탐방할 때 인사를 드렸던 김재동 휴천면장님께 전화를 드렸다. 내 이야기를 들은 면장님은 내가 서 있는 그 바위가 한오대가 맞다고 하면서 한남마을 박찬조 선생을 찾아가면 여러 가지 더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전화를 받은 다음 위험해 보이는 강쪽 바위면까지 살펴보았더니 한오대(漢鰲臺)란 글씨가 있고 그 옆에 많은 사람의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박락(剝落)이 심해 사람들 이름은 해독이 어려웠지만 한오대란 글씨는 분명히 읽을 수 있었다.

 

한오대란 한남군[漢]이 노닐며 시름을 달래던 자라[鰲] 모양의 돈대 바위[臺]란 의미일 텐데 그 이름이 바위의 모양새와 절묘하게 어울린다. 바위의 모양새가 지리산 속에서 내려온 커다란 자라가 목을 빼고 심산유곡에서 흘러내린 엄천강물을 마시고 있는 듯한 모습 그대로다. 한오대란 글자를 보는 순간 나는 갑자기 560여 년 전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툭 던져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오사화와 갑자사화 그리고 유향 함양의 영욕이 갈리게 된 바로 그 출발점 세조의 왕위찬탈과 불의에 항거해 목숨까지 걸었던 올곧은 충신들의 저항이 빚어낸 역사적 소용돌이 속에 빠져버린 듯한 이런 기분은 현장 답사가 아니고서야 어찌 느낄 수 있으랴. 우리 함양은 알면 알수록 더욱 빠져들 수밖에 없는 아름답고 유서 깊은 고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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