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장 연합회 회장 © 함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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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년 1월 2일은 음력 섣달 초여드레로 퇴계(退溪) 선생의 불천위(不遷位) 제사(祭祀)가 봉행되는 날이었다. 필자는 2019년을 보내고 2020년을 맞는 송구영신의 순간 산삼엑스포의 성공적 개최를 기원하는 ‘상림공원 제야의 종 타종식’과 ‘백암산 해맞이 행사’에 참석하려고 함양에 내려가 있었기 때문에 몇 시간이나 차를 몰고 힘겹게 달려가서야 퇴계 선생의 불천위 제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이렇게 애써 선생의 불천위 제사에 참석한 것은 퇴계 선생께서 지으신 도산십이곡(陶山十二曲)이 선생의 불천위 제사 마당에서 처음으로 헌창(獻唱)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퇴계 선생께서는 65세 때 평생 동안의 공부를 통해 깨달은 삶의 지혜를 오롯이 담아 한문을 모르는 사람들도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언문으로 도산십이곡이라는 열두 곡의 가사를 짓고 “언젠가 음률을 아는 사람이 곡을 붙여 사람들이 이 곡을 노래하고 춤추는 가운데 배우고 익혀 선하고 바르게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바램까지 적어 두셨는데 선생의 이 소망은 450여 년이 지나서야 이루어졌다. 선생의 제자였던 학봉 김성일 선생의 후손인 김종성 교수가 곡을 붙이고 이 곡을 익힌 도산서원선비문화수련원 지도위원들이 선생의 불천위 제사 마당에서 처음으로 불러 드렸다.
필자는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인 도북 골짝에서 태어나 그 골짝이 세계의 전부인 양 알고 어린 날을 보낸 견문이 좁은 사람이라 조상 제사(祭祀)는 4대까지만 모시고 그 이후에는 묘사(墓祀)로 나가는 것이라고만 알고 있었다. 퇴임 후 도산서원에 출입하고서야 불천위 제사란 것이 있고 안동지역에는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종가가 마흔여덟 집이나 있으며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집안에서는 그것을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보통 기제사(忌祭祀)는 조상이 돌아가신 기일(忌日)에 올리는 제사로 4대(代) 봉제사(奉祭祀) 원칙에 의해 제주가 부(父), 조(祖), 증조(曾祖), 고조(高祖) 부모까지 돌아가신 날 모신다. 제주가 죽고 그 아들이 제사를 이어받게 되면 기제사 대상에서 벗어나는 5대조는 조매(祧埋)라 하여 신주(神主)를 땅에 묻고 시제로 모시는 묘사로 넘어가게 된다. 그러나 모셔진 어른이 큰 업적을 남긴 훌륭한 어른일 경우 5대가 넘어도 신주를 묻지 않고 자손이 있는 한 영원히 기제사를 모시도록 정해진 특별한 제사가 불천위 제사다.
불천위는 부조위(不祧位)라고도 하며 불천위를 모시고 있는 사당을 불천위 사당 또는 부조묘(不祧廟)라고 한다. 불천위 제도의 시원(始原)이 된 주(周)의 종법제도(宗法制度)에 의하면 불천위로 추대되면 문중 내에서 새로운 파를 창설하여 종가(宗家)를 형성할 자격을 가지게 된다. 흔히 우리가 종가라고 하는 집은 불천위 선조가 있고 불천위를 모시는 사당(祠堂)이 있으며 불천위 제사를 모시는 종손(宗孫)이 사는 집을 말한다. 어떤 집성촌 마을에서 불천위가 아닌 입향조의 적통을 잇고 있는 주손(胄孫)을 종손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있으나 이런 관점에서 보면 틀린 말이다. 그냥 주손이라 부르는 것이 맞다.
불천위 제사는 4대 조상까지 모시는 일반 기제사와 달리 큰제사[大祭]로 불리며, 참제자도 자손만이 아니라 인연이 있는 다른 가문 후손들까지 적극 참사하기에 제물, 제관, 격식 등에서 차별화된다. 불천위 조상은 추모 공간에서도 특별히 우대된다. 4대 조상과 달리 독립된 별묘(別廟)에 모시거나 합사하더라도 이서위상(以西爲上)의 원칙에 따라 사묘의 가장 서쪽 감실(龕室)에 안치한다.
불천위는 국불천위(國不遷位), 향불천위(鄕不遷位), 사불천위(私不遷位)로 대별된다. 국불천위는 개국이나 전란·정변 등에서 세운 공적을 인정받아 임금이 직접 예조에 명(命)함으로써 추대되며, 향불천위는 지역 향교나 서원에서 학덕이 높은 인물을 천거하여 이를 예조에서 상소하면 조정에서 타당성을 검토한 다음 불천위로 지정한다. 사불천위는 입향조 등 추앙받을 만한 인물이 있는 경우 임의로 모신 것이다.
조선시대 불천위 추대는 초기에는 공신(功臣) 중심으로 행해졌으나 후대로 갈수록 현조(顯祖)를 중심으로 후손이 결집하여 가문의 위광을 더하고자 국가로부터 인증받지 않았음에도 임의로 중시조를 세워 불천위로 하는 경우도 생겼다. 불천위 추대의 기반이 된 훈봉공신(勳封功臣)은 1등에서 4등까지의 정공신(正功臣)과 등외의 원종공신(原從功臣)으로 분류되는 데 불천위 추대 대상은 주로 정공신이었다. 안동지역 불천위 50위를 조사 연구한 김미영 박사에 따르면 불천위로 추대받은 사람들은 정공신(正功臣) 외에도 다수 있는데 실직(實職)이든 증직(贈職)이든 정2품 이상의 고위 관직을 지내고 시호(諡號)를 받았거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되 높은 학문적 성취를 이루고 제자 교육이나 덕행으로 지역사회의 사표(師表)가 되어 서원과 사우에 제향된 학덕(學德)을 겸비(兼備)한 사람들이었다.
늘 안동과 비견되는 우리 함양에는 어떤 불천위 어른이 계실까 궁금했다. 함양군지를 찾아보고 알만한 사람을 찾아다니며 물어보아도 명쾌한 답을 얻지 못했다. 그냥 발로 뛰면서 찾아본 우리 함양지역 불천위 종가는 불천위 종가로서의 위광(威光)이 사라진 경우가 더러 있었다. 전쟁과 산업화를 거치면서 문중 중심의 집단의식이 약화 되고 개인주의가 심화 되어 종손이라는 자리가 멍에가 되어버린 현실을 견디지 못해 종손은 떠나가고 종가는 허물어진 경우도 있었다. 문화재로 지정된 일두 선생 종택의 불천위 사묘나 종손이 듬직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는 개암 선생의 불천위 가묘 등도 있으나 방치되고 퇴락되어 부조묘가 있음으로써 오히려 조상들을 욕보이는 상황이 된 불천위 사묘도 있었다. 대표적인 경우가 뇌산에 있는 양양공(良襄公) 김교(金嶠) 어른의 부조묘다. 양양공은 이시애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1등에 책록(冊錄)되고 오림군(烏林君)에 봉해졌으며 공조판서, 평안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불천위가 된 함양지역 선산김씨의 현조(顯祖)이지만 부조묘는 현재 사람이 드나들 수 없을 정도로 퇴락되어 가슴이 아팠다. 지역 문화의 보존과 재정립 차원에서 함양지역의 불천위 종가를 체계적으로 연구하고 행·재정적 지원 방안을 강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퇴계 선생의 불천위 제사는 선생께서 돌아가신 음력 섣달 초여드렛날 저녁 오후 여섯 시에 봉행된다. 예전에는 돌아가시기 전날 저녁에 모여 돌아가신 날 첫 시각 자시(子時)에 모셨으나 현재의 종손 어른이 예(禮)는 시속(時俗)을 따라야 한다는 선생의 가르침을 받들어 현대사회의 변화된 여건에 따라 바꾸었기 때문이다. 함양지역 불천위 종가들도 세상 변화를 수용하면서 과거의 전통을 이어가는 문화 계승 발전의 주체가 되면 좋겠다.
* 지난번 이후백 선생 탑반송 시에서 첫 글자(一)가 빠졌기에 바로잡습니다.
** 독자 중에 우리 지역 불천위 종손이나 자손이 계시면 함양지역 불천위 제례에 대해 심층적으로 연구할 수 있도록 메일 (honggog@hanmail.net)이나 전화(010-3822-0708)로 연락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