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 연합회 회장 © 함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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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년 전 우리 함양에는 천령삼걸(天嶺三傑)이라 불리는 탁월한 인물 세 사람이 일시에 나타났다. 바로 구졸암 양희(梁喜, 1515~1580), 옥계 노진(盧禛, 1518~1578), 청련 이후백(李後白, 1520~1578)이다.
이 세 사람은 태어난 시기가 비슷했다. 이들이 태어난 때는 점필재 김종직 선생이 함양군수로 와서 기른 제자들이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로 참화를 당하여 함양의 학문 풍토가 극도로 위축되었다가 중종반정으로 기운을 되찾는 듯하더니 기묘사화로 다시 화를 입어 기력이 극도로 쇠잔해진 바로 그 시기였다. 선비로 공부를 하는 것이 어쩌면 목숨을 건 위험한 일로 받아들여질 수도 있는 위중한 시절이었다. 위기는 기회가 될 수도 있음인지 이들이 태어난 때는 조선의 대표적 성리학자인 퇴계 선생(1501년 생)과 율곡 선생(1536년 생)이 태어난 꼭 중간 시점으로 그들과 동시대를 살면서 성리학이 가장 활발하게 탐구되던 시대를 함께 살았다.
천령삼걸은 집안 내력도 비슷하고 가르침을 받은 은사도 같았다. 구졸암 양희는 조부가 의주목사와 동지돈녕부사(同知敦寧府事)를 지내고 청백리로 녹선된 일로당(逸老堂) 양관(梁灌, 1437~1507) 선생으로 열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으며 옥계 노진은 증조부가 예조참판과 대사헌을 지내고 청백리로 녹선된 송재(松齋) 노숙동(盧叔仝, 1403~1463) 대감으로 여섯 살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랐다. 청연 이후백은 증조부가 대사성과 이조참판을 지낸 몽암(夢庵) 이숙함(李淑瑊, 1429~?) 대감으로 열 살도 되기 전에 부모님이 함께 돌아가시고 백부 집에서 자랐다. 세 사람은 다 자랑스런 증조부나 조부를 둔 사대부 집안의 자식들이었지만 아버지나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기에 넉넉지 못한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며 아버지를 통한 가학(家學)의 혜택도 크게 받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이 아버지의 부재로 인한 학습결손을 만회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도 남해에서 함양으로 들어와 처가 마을 가성에서 서당을 열고 제자들을 가르치던 당곡 정희보 선생의 가르침 덕분이라고 생각된다. 구졸암은 수동 효리, 옥계는 지곡 개평, 청연은 가성에 살고 있었기에 거리상 그렇게 먼 곳이 아니라서 가성의 당곡 선생 서당에서 함께 공부할 수 있었을 것이다.
앞으로 3회에 걸쳐 천령삼걸의 흔적을 탐방하고 그들의 삶에서 오늘을 살아갈 지혜를 배워보고자 한다. 출생 연도에 따라 구졸암 양희 선생부터 찾아뵙는다.
수많은 시인묵객이 찾아와 시를 읊고 글을 남기거나 묵헌(黙軒) 선생의 청금유수(聽琹流水) 석각(石刻)처럼 대 위에 앉아 남계천 물소리를 자연이 울리는 거문고 소리로 느끼고 즐기던 명소 대고대에는 고풍스런 비각이 하나 서 있다. 바로 구졸암 선생의 신도비각이다. 신도비(神道碑)는 본래 왕이나 종친 또는 정2품 이상 고관의 무덤이나 무덤에 이르는 길가에 세워졌던 것이니 이곳에 신도비가 있다는 것은 인근에 구졸암 양희 선생의 무덤이 있다는 말이다.
구졸암양공신도비명(九拙庵梁公神道碑銘)이라 제(題)한 신도비문은 대제학을 지낸 서당(西堂) 이덕수(李德壽, 1673~1744) 공이 지었으며, 호조참판을 지낸 노광두(盧光斗) 공이 글씨를 쓰고, 홍문관부교리지제교겸경연시독관이었던 조인섭(趙寅燮)이 전(篆)을 썼다. 이 비에는 숭정(崇禎) 기원후 4주(周) 무오년(戊午年) 3월 6일에 추건(追建)했다고 적혀 있으니 1738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지금으로부터 282년 전에 세워진 비석임에도 글씨가 선명한 것은 후손들이 비각을 지어 비를 잘 보호했기 때문이리라.
비문을 보면 양희 선생의 본래 조상은 제주도의 삼성혈(三姓穴) 전설에 나오는 양을나(良乙那)이다. 신라 때 양(良)을 양(梁)으로 고치고 남원을 관(貫)으로 받아 그 이후 남원양씨(南原梁氏)가 되었다고 한다.
양희 선생은 자(字)가 구이(懼而)요 자호(自號)가 구졸암(九拙庵)이다. 구이라는 자는 험난한 세상을 두려워하고 조심하며 살아가라는 어른들의 바램을 볼 수 있으며 스스로 구졸암이라는 호를 쓰고 구졸십영(九拙十詠)이란 시를 남긴 것으로 보아 삼가고 겸손하게 처신하면서 살아가고자 했던 그의 자세를 알 수 있다. 아마도 사화의 광풍으로 뛰어난 선비들이 속절없이 쓰러져 가는 것을 경험한 시대적 아픔이 반영된 자(字)요 호(號)일 것 같다. 졸(拙)은 ‘시원찮다, 서투르다, 쓸모가 없다, 모자라다, 별로이다’ 등의 의미를 지닌 글자인데 스스로 성품이 졸하고(性拙), 용모가 졸하고(貌拙), 말이 졸하고(言拙), 글이 졸하고(文拙), 벼슬이 졸하고(官拙), 정사가 졸하고(政拙), 벗과 사귐이 졸하고(與朋友交拙), 몸을 위한 꾀가 졸하고(爲身謀拙), 자손을 위한 계획이 졸하다(爲子孫計拙)고 하였으니 자신을 천지간의 한 마리 좀벌레[一蠹]에 불과하다고 했던 일두 선생의 그 겸허한 호와 상통한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양희 선생은 중종 경자년에 26세의 나이로 사마시에 일등으로 합격하고 32세인 명종 병오년에 대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을 거쳐 선조 13년 66세 때 중국에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이국(異國)의 옥하관(玉河館)에서 병으로 돌아가셨다. 돌아가시기 전 마지막으로 남긴 글에서는 나라의 은혜 다 보답하지 못한 소회만 적었을 뿐 사사로운 일은 말하지 않았다. 끝까지 공인으로 살다간 어른이셨다. 삼남 사녀를 두었는데 큰 사위가 광해군 때 영의정을 지낸 내암 정인홍(鄭仁弘)이었다.
구졸암의 산소는 대고대 인근 공배마을 앞쪽 우산(牛山)에 있는데 지금은 바로 앞을 대전 통영고속도로가 관통하여 접근로가 옹색하다. 하지만 산소 앞에 서면 남계서원과 청계서원 그리고 연화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멀리 도북 뒷산 호암산(虎巖山)이 하늘과 땅을 가르며 안산(案山)으로 당당히 자리하고 있어 천하에 명당이라는 생각이 든다.
구졸암 선생의 산소에는 마땅히 있을 법한 석양(石羊)이 없다. 우리가 어릴 때 즐겨 타고 놀았던 일두 선생의 산소 앞 거대한 석양도 도둑을 맞아 지금은 조그마한 석양으로 대체되어 민망한 모습인데 구졸암 선생의 산소도 도둑이 석물을 가져갔다고 한다. 참 민망한 일이다. 소중한 지역 문화유산은 우리 함양인들이 관심을 가지고 함께 지켜나갔으면 좋겠다.
욕심을 더 낸다면 이 나라의 위정자들이 사익(私益)을 위해서가 아니라 죽는 날까지 나라만 생각하며 살았던 구졸암처럼 공인(公人)으로서 국가를 위해 올바르게 정무에 임해 주면 참 좋겠다. 자신의 이익이나 자식을 위해서는 체면도 염치도 내팽개치고 자신의 지위와 힘을 이용하고 스스로 아무 잘못 없다고 강변하는 일부 고위공직자들 관련 뉴스를 자주 접하다 보니 공인으로서 올곧게 살다간 우리 함양의 선현 구졸암 양선생이 더욱 그립다. 탁주 한잔 부어 올리며 경배하고 내려오는 후인의 이 마음을 고인께서는 알기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