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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충현 출향인의 고향 그리기] 선비의 고장 함양의 충절 선현 덕곡 조승숙 선생을 찾아서
 
함양신문 기사입력  2020/07/13 [10:29]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권충현 재외함양군향우회  © 함양신문

우리 함양인들은 흔히 좌안동우함양을 이야기하며 선비고을 사람임을 자랑한다. 그런데 선비란 어떤 사람인가 질문받으면 답하기가 쉽지 않다. 흔히 학식(學識), 지조, 청렴, 청빈, 절제, 명예 등을 말하며 선비를 정의한다. 선비는 간단히 말하면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고자 공부하고 실천했던 사람’이다. 경제적•물질적 가치에 경도된 현대인들은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없지 않지만 선비들은 경제적•물질적 풍요보다 사람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는 것을 더 가치 있다고 생각했다.

 
  선비들이 가장 중시한 사람다운 삶의 덕목은 부모에 대한 효(孝)와 국가에 대한 충(忠)이었다. 함양에서 충절(忠節)로 이름을 남긴 선비로는 덕곡(德谷) 조승숙(趙承肅) 선생이 으뜸이다. 덕곡 선생은 고려가 망하자 중국의 고사에 나오는 백이•숙제(伯夷叔齊)처럼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인 덕곡에 은거하여 죽을 때까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대의(大義)를 지킨 선비였기에 충절의 고장 함양을 이야기할 때면 가장 먼저 이야기되는 인물이다.

 
  덕곡 조승숙 선생은 1357년 고려 공민왕 5년에 태어나 1376년 약관 20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이듬해 21세에 대과에 급제했던 우리 함양의 인재였다. 고려가 망하기 직전이었던 1391년에 부여감무(扶餘監務)로 임명되었는데 이듬해인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 은거했다. 서른여섯 살 젊은 나이였다. 감무(監務)는 고려 때 현감을 둘 수 없는 작은 현(縣)의 감독관으로 조선 초까지 존속되고 후에 현감(縣監)으로 개칭된 관직명이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될 때 불사이군의 충절 대의를 지켰던 대표적인 사람들을 역사에서는 두문동(杜門洞) 72현(賢)이라 부른다. 문을 닫아걸고 나오지 않는 것을 의미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이라는 말의 두문(杜門)을 동명(洞名)으로 쓴 두문동은 태조 이성계의 조선 건국에 반대하며 절의를 지킨 고려말의 유신(遺臣)들을 통칭하는 말이 되었는데 기우자(騎牛子) 이행(李行, 1352~1432) 선생의 ‘두문동72현록(杜門洞72賢錄)’에 실려 있는 함양인은 덕곡 조승숙 선생이 유일하다.

 
  벼슬을 던지고 귀향한 선생은 덕암마을 동쪽 시냇가 층암(層巖) 위에 모정(茅亭)을 짓고 성리학 연구에 몰두하였는데 학생들이 배우고자 몰려오자 평생 아이들을 정성껏 가르쳤다. 그래서 사람들은 선생의 모정을 교수정(敎授亭)이라 불렀고 교수정이 있는 언덕을 교수대(敎授臺)라 했다. 선생의 가르침은 이후 이 지역에서 일두, 옥계, 청련, 개암 등 우리 지역의 걸출한 인재 배출과 추로향(鄒魯鄕)이라는 평판의 토대가 되었다. 

 
  교수정은 오랜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차례의 존폐(存廢)를 거쳐 지금은 송림 속의 단아한 정자로 존재하고 있다. 여전히 같은 곳에 서 있는데도 지금은 덕암 동쪽 물 건너 산 아래 정자라기보다는 안의-지곡 대로변 송림 속 정자가 되었다. 도로가 나면서 접근로가 바뀌었기 때문이다. 대전통영간고속도로 지곡 톨게이트를 나와 개평 쪽으로 돌아들면 곧바로 신령스러운 기운이 느껴지는 수백 년 수령의 송림과 숲속의 정자를 만나는데 교수대와 교수정이다.

 
  교수정과 덕암천 사이 층암에는 자연석을 다듬어 만든 돌거북 위에 높이가 3.2 미터나 되는 거대한 비석이 서 있다. 그 유명한 수양명월(首陽明月) 율리청풍(栗里淸風) 비석이다. 전면(前面)에는 성종 임금의 사제문(賜祭文) 속에서 뽑아낸 바로 그 여덟 글자와 뇌계(雷溪) 유호인(俞好仁)이 임금의 명을 받들어 삼가 제문을 지어 올린다는 글과 이조판서 허전(許傳)이 글자를 쓰고 참봉 정직현(鄭直鉉)이 전(篆)을 썼다는 내용이 새겨져 있으며, 후면(後面)에는 덕곡 선생 사적(事跡)과 교수정 중건(重建)에 대한 기술(記述) 및 숭정(崇禎) 5 임오(壬午) 의정부좌의정(議政府左議政) 송근수(宋近洙) 근기(謹記)라는 글이 새겨져 있다.

 
  함양금석문총람에서는 이 비가 1395년 을해년에 구축되고 1690년 경오년에 재건되었다고 적고 있으나 글자를 쓴 허전이 1797년부터 1886년까지 산 사람이고 전(篆)을 쓴 정직현이 1832년에 태어난 사람이며 비문을 지은 송근수는 1818년부터 1903년까지 산 사람으로 좌의정이었던 1882년에 미국과의 통상조약체결을 반대하여 사직했던 사람이니 총람 내용과는 맞지 않는다. 또한 ‘숭정(崇禎) 5 임오(壬午)’를 숭정(崇禎) 5년 임오년(壬午年)이라고 해석하고 있으나 숭정 5년은 임신년(壬申年, 1632년)이었다. 숭정제 때 임오년은 숭정 15년 1642년이었다. 그러므로 숭정(崇禎) 5 임오(壬午)는 1642년부터 다섯 번째 임오년인 1882년으로 해석해야만 한다.

 
  비문에서는 교수정이 수백 년 세월이 지나는 동안 몇 번이나 흥패(興敗)하였으며 고종 경오년(1870년)에 덕곡 선생의 후손들이 뜻을 모아 황폐한 유허지에 교수정을 다시 짓고 정자 곁에 큰 글씨로 성종의 하사 제문에 있는 여덟 글자를 새겨 걸었는데 비석 전면에 있는 글씨가 바로 그것이라고 했다. 그러므로 전면의 ‘유호인이 임금의 명을 받아 지었다’는 말은 수양명월(首陽明月) 율리청풍(栗里淸風)이라는 말이 유호인이 지은 성종의 사제문 속에 있다는 말일 뿐이다. 유호인은 1445년부터 1494년까지 살았던 사람이다. 수양명월 율리청풍은 성종 임금이 덕곡 선생을 수양산(首陽山) 명월(明月) 같은 백이•숙제(伯夷叔齊)의 충절과 벼슬을 초개같이 버리고 고향 율리(栗里) 자연 속에서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던 도연명(陶淵明)의 깨끗한 풍도를 지닌 사람으로 경모(敬慕)한다는 헌사(獻辭)였다.

 
  덕곡 조승숙 선생은 태종 17년 정유년 1417년에 61세의 나이로 돌아가셨다. 묘소는 지곡면 보산리 신영마을 야산에 있다. 부야마을과 고속도로 사이 신영마을 진입로에는 거대한 안내 표지석이 서 있다. 지난 초봄 덕곡 선생 산소에 참배를 갔다가 묘소 입구가 개 사육장 우리로 만들어져 진입도 안 되게 막혀있는 것을 보고 좌안동우함양이니 세계인류문화유산 남계서원이 있는 선비고을이니 하며 자랑하는 우리 함양의 민낯을 보는 것 같아 선현께 참으로 민망하고 송구스러웠다. 우리 자신을 가치롭고 귀하게 만드는 것은 남이 아니라 우리 자신이다. 우리 함양인이 먼저 우리 함양을 가치롭고 귀하게 가꾸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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