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전생의 인연에 의해서 출생하는데 ‘전생의 못다 한 업을 현생에서 풀기위해 부모를 인연으로 태어난다. 부모는 전생의 업연(業緣)으로 아들의 업을 풀어주기 위해 자식을 출생케 한다. 이런 인연이 있기에 부자간의 인연이 되었으면 살아가면서 악업을 씻고 선업을 닦아 나가야 한다.’는 것이 불교의 인연관(因緣觀)이다.
우리나라 정계는 권력이 바끼면 앞사람의 잘못만 들추어 원을 갚으려 한다. 그래서 악업을 쌓고 뒤바뀌면 또 복수를 하려한다.
원한은 용서와 포용으로 풀어야 하지 원한을 원한으로 풀어 서는 끝이 업고 국민이나 주변 사람이 피곤하다.
이를 예화를 들어 말씀드리면 ‘이솝우화’ 중에 농부와 뱀이라는 이야기가 있어 소개합니다. 옛날 어느 날 뱀 한 마리가 농부의 아들을 물어 죽였습니다. 그러자 분노에 찬 그 농부는 도끼를 들고 뱀이 들어 있는 굴의 입구를 지키다가 뱀이 기어 나오려 머리를 내밀자 도끼로 내리쳤습니다. 그런데 너무 긴장한 탓인지 도끼가 빗나가며 옆의 바위를 두 동강 내고 말았습니다. 굴을 나오던 뱀이 농부를 째려보자 농부는 몸이 굳어 움직일 수가 없었습니다. 겁에 질린 농부가 뱀에게 화해를 요청했습니다. 그러나 뱀은 단호히 거절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괜히 좋은 감정인척 하지 말게, 자네는 아들의 무덤을 볼 때마다 자식을 생각할 것이고, 나는 갈라진 바위를 볼 때마다 자네 생각을 하며 몸서리를 치겠지”
이 이야기를 보면 ‘원한(怨恨)은 원한에 의해서 사라지지 않는다. 원한을 버릴 때 원한은 사라진다. 이것은 영원한 진리다.’라고 하신 부처님 말씀이 떠오릅니다. 원한은 원한에 의해 절대로 갚아지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아야 한다. 알면서도 불행을 자초함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본다. 순간의 되갚음을 통해 불행해지는 것보다 고통 스럽 드라도 영원히 행복한 길을 찾는 지혜가 더욱 절실한 때이다.
원한은 불교의 삼독(三毒)의 하나인 성냄(嗔)이다. 이 화냄 즉 원한을 참아야 하는데 그 참는 것은 상대에게 굴복하거나 자기 신념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다. 스스로를 비춰보는 강한 이성의 힘으로 참는 것이니 이는 용기 있는 자만이 할 수 있는 강력한 의사 표현입니다. 인도의 간디나 티베트의 다라이 라마가 증명한 것입니다. 그들은 분노와 공포 속에서도 참으면서 끝내 비폭력으로 신념을 지켰습니다.
사람을 살해한 앙구르마라(살인자)는 박식하고 똑똑한 제자였으나 스승의 딸이 자기를 겁탈했다 모함하자 스승은 벌로서 사람을 7일 만에 100명 죽여 도를 이루라해 산길에 숨어서 많은 사람을 죽이자 부처님이 찾아가서 살인을 못하게 말기고 왕의 용서를 받고 제자로 삼았습니다. 원한을 풀기위해서이다. 원한을 풀기 위해 참는다는 것은 소극적인 의미가 아니라 서로의 관계 회복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서로 유익한 결과를 가져오는 적극적인 행동인 것입니다.
우리는 오래전부터 나 이외의 것들을 타자화(他者化)시켜서 보는 습관에 젖어 있습니다. 하지만 ‘나’는 ‘나 아닌 것’들의 총화(總和)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있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나 아닌 무수한 관계들의 도움 속에서 살아가고 있다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사회나 정가나 나 아닌 적대 관계자를 용서해 품어야 한다.
우리가 성인(聖人)이라고 추앙하는 분들은 참을성이 많은 것은 물론 중생들의 삶이 나의 삶과 다르지 않다는 동체대비(同體大悲)의 마음을 가지셨기에 원수마저도 사랑해야한다고 했습니다. 부처님은 “중생이 아프니 나도 아프다”고 했습니다. 결국 분노의 근본적인 원인은 나와 세상이 다르다고 보는데서 기인합니다. 그렇게 세상을 보는 한 누구든 언젠가는 원한의 마음을 갖게 마련입니다. 자비로서 매듭을 풀어야 합니다.
이순신 장군이 투항한 적장을 장수로 받아 드려 대접했기에 총탄에 쓰러 질 때 대신해서 지휘해 적을 쳐서 승리 했다. 이게 포용의 대가이다. 여름에 꽃이 아름답게 피고 있습니다. 꽃이 피는 힘과 내가 아름답다고 쳐다보는 힘은 둘이 아니겠지요. 사람도 나는 다른 사람이 있기에 존재하니 함께 가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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