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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암 소재우 함양 野史]함양 읍성(邑城)의 객사(客舍)는 왜 없나? (1)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9/10/07 [10:58]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옛날 봉건시대 때에는 각 고을(郡)의 소재지를 읍성이라 하였고 읍내를 방어(防禦)하고 치소(治所)를 위해 성벽(城壁)을 쌓았다. 그리고 성내에는 수령의 집무처 동헌(東軒)이 있고 우측에는 사령청이 있고 앞에는 형방소, 마방이 있다. 육방(六房)관서와 숙위(宿衛)가 있고 지방의 대표 인사들이 모이는 향청(鄕廳)이 소재하였다. 읍성 중심에는 객사가 있는데 이는 객사의 정당(正堂:중앙)에 왕권의 상징인 전패(殿牌)를 모시었기에 객사를 중심에 두었고 좌우에는 익사(翼舍)를 두어 손님을 머물게 했다. 객사를 관리하는 아전(衙前,공무원)을 두었다. 이런 중요한 함양객사에 대해 선비의 고장이라면서 잘 모르고 있어 이해를 위해 설명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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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사(客舍)의 의미와 유래
 
 객사는 고려 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둔 관사이며 객관(客館)이라고도 한다. 『고려사』에 충열왕 5년(1279) 8월에 객관을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고려 초기부터 있었고 관찰사가 있는 감영(監營)의 객사는 정부의 관리나 외국 사신이 내왕 할 대 묵었으며 연회도 가졌다 한다.
 조선시대는 객사의 주사(主舍)인 정당에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인 전패(殿牌)를 안치하고 초하루와 보름에 달을 보며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리는 향망궐배(鄕望闕拜)를 하였다. 왕과 국가에 대한 예를 올리는 국가체제의 상징이었다. 중앙의 관리가 이곳에서 교지(敎旨)를 전하기도 한다. 전주 객사는 이성계 영정을
 * 전주감영 객사 : 풍패지관, 정전에 이성계
   영정 모심
 모시었으며 특별한 곳은 임금이 친필의 편액을 내리기도 한다. 한편 양쪽 익사(翼舍)는 중앙에서 오신 관리의 숙소로 사용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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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물의 구조는 중앙의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사(翼舍)를 두고 앞면에 중문 외문 옆면에 객사 관리를 하는 아영청(亞營廳)

 

무신사(武臣祠) 및 무랑(廡廊)등의 부속 건물을 두었다. 중앙 정당에는 기와나 돌을 깔았고 좌우 익실은 온돌을 깔았다. 대청을 시원한 양청(凉廳), 온돌방을 오실(澳室)이라 하였다 남쪽지방은 임진왜란 때 왜구가 성을 탈취해 주둔하기도 했고 성을 파괴 할 때 소실되기도 했다. 그 후 다시 복원하면서 보편화 되었다.

관리하는 아전(衙前)을 두었는데 고려 현종 때는 지역의 장정(壯丁)수에 따라 지방 직인 객사사(客舍史)의 수를 증감 하였고 조선 때는 6두픔 좌윤(佐尹)의 객사정(客舍正)을 두고 하급 아전을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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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객사의 수난(受難)

객사는 전패를 모시고 왕과 국가에 대한 충성의 예()를 올리는 봉건(封建) 국가체제의 상징적 장소였다. 이에 근거하여 한말 국권이 찬탈되자 애국심을 없애기 위해 객사를 소멸시켜 갔다. 통감부 설치 후 갑오개혁기에 객사가 행정구역의 변경으로 그 기능이 다한 객사는 다른 용도로 전용되었는데 주로 군청 학교로 개조했다. 그래도 지방 읍성의 일부 객사와 전패봉안 및 행례(行禮)는 유지 되었다.

러시아 공관으로 피신한 아관파천(俄館播遷)이 성공한 후는 전패가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로 바뀌었고 객사의 정비와 수축(修築)을 계속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면서 함경도 평안도 일대의 객사는 일본군 주둔 기지로 변해 궐패가 다른 곳으로 이전되어 객사의 기능과 상징성이 상실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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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강점 때 조선시대 관청의 등급을 매겨 하등(下等)은 없앴다. 19068월 보통학교령에 의해 많은 학교를 세우자 교실이 없어 규모가 큰 객사와 누각을 학교용 건물로 개조해 전용(轉用)하였다. 1908년 재판소가 생기면서 객사를 재판소로 전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때에도 황제의 상징인 궐패(闕牌)를 봉안하는 전당(殿堂)의 기능은 유지 시키면서 좌우익의 건물을 새로운 관청으로 전용하였다. 1907년 순종 즉위 후부터 보통학교와 행정관청에 전패를 봉안하자 객사의 전패 봉안 기능이 상실되어 갔다. 그리고 전패도 황제의 어진(御眞,사진)으로 바꾸어 봉안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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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 190911월 객사의 궐패봉안이 중지되고 객사기능이 정지되었다. 그래도 계속 객사에 어진을 봉안하자 한일 합방 후에 금지 되었다. 그 후 황제 사진 봉안 대신 국기 계양으로 대치되다 일제가 지배하자 일장기를 계양하다가 해방이 되자 태극기를 계양 했다. 오늘 날 까지 관청에서는 국기를 게양하거나 걸어 놓는 것은 옛 객사의 잔재(殘在)라 본다.

객사가 없어진 이유는 합병직후 통감부의 관공서 고 건축물 조사 시 객사는 보호에서 제외되는 병, 정 급을 받아서 타 용도로 사용해 소멸되게 하였다. 황제 사진을 못 모시게 하는 것은 국민정신 말살 정책이 숨어 있었다. 그래도 현재 각 시군에 남은 것은 지방유지의 애국정신으로 살아남았다. 지금의 남은 것은 조선시대 객사이며 지방의 유물 복원에 따라 새로 복원 한 것도 많다. 강릉 객사문, 전주객사, 고령 가야관 경주 동명관은 조선 전기 건물이다. 함양도 1975년까지 함양초등교에 있었는데 교실 개축하면서 매각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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