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년 동안 설움을 받아가며 변죽을 울린 탓에 변강쇠⋅옹녀의 설화가 이제 ‘신 문화’로 함양에 자리를 굳히고 있다. 변강쇠 옹녀 문화는 남원의 춘향전, 진주의 논개 문화처럼 기방문화는 아니지만 남녀간의 ‘이색 설화’라는 점은 유사하다.
변강쇠의 ‘건강문화’, 옹녀의 ‘정절의 문화’는 향후, 춘향이와 논개문화와 비교해 관심의 확장성은 그들을 능가하는, 가히 폭발적일수도 있을 것이다.
진주는 함양의 이웃으로서 함양의 천령문화제보다 더 높이 평가받는, 전국에서 최고의 문화제로, 대통령이 빠짐없이 참석을 했었던 ‘개천예술제’가 있는, 사실상 예술의 도시였다. 그래서인지 진주는 기방문화도 번성 했었다.
다음은 고려대 최이락 교수의 진주 기방문화에 대한 글을 옮겨본다.
우리말 속에는 특정한 고장을 가리킨 것들이 회자되고있다.
조선시대때부터 전해오던 ‘함흥차사’ 와 ‘안성맞춤’이 있고
한국전쟁때 생긴 ‘원산폭격(대가리 박아)’과 '낙동강 오리알' 도 있다. 또 삼천포 사람들이 제일 싫어하는 것 중에 ‘잘 나가다가 삼천포로 빠졌다’라는 말도 있다.
천년고도 진주에는 이런 말이 없을까?
'진주라 천리길' 이란것이 있고 '진주난봉가'라는 노래도 있다. '진주라 천리길'은 한양에서 멀다는 것이다.
옛날의 진주는 경상우도로서 도시가 제법 컸다. 신라때는 9주5소경 중 하나였고 일제시대에는 진주가 도청소재지였다. 선비가 진주에 올때는 관직에 임명받고 내려오는 곳이지 유배지가 아니었다. 그러니 진주라 천리길이란 말은 오지의 대명사인 삼수갑산과 같은 의미는 아니다.
'천리길 진주'란 말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대중가요의 영향이 크다. 이규남이 부른 ‘진주라 천리길’은 당시 폭발적인 인기를 모았다.그 뒤 진주가 낳은 불세출의 가황 남인수와 이미자, 김용임이 같은 노래를 리메이커 했다. 한때 진주의 관문인 새벼리 도로변에 ‘천리길 진주, 잘 오셨습니다’라는 대형 입간판이 세워졌던적도 있다.
천리길 진주는 미인의 고장으로 이름나 있다.
'南晋州 北平壤'이란 말이 있을정도로 색향(色鄕)이다. 혈기왕성한 젊은 선비는 평양 아니면 진주로 발령받아 가고 싶었던게 당시 한양도련님의 로망이었다. 왜냐하면 교방소속의 관기가 모두 기관장 차지가 되기 때문이다.
사람이 잘 났다는 것을 재색(才色)이 구비되었다고 한다. 재색을 '달란트'라고 하는데 오늘날의 탈렌트(talent)라는 말의 어원이 되었다. 요즘 탈렌트를 옛날말로 하면 기생(妓生)이다. 기생은 비록 신분이 천민이지만 아는것이 많고 교양이 있는 문화인이었다. 이들은 노래, 춤, 악기,학문, 시, 서화를 알고, 말씨나 행동이 고상하여야 했다. 기생은 선배인 퇴기로부터 기본적인 춤과 노래, 시조 등을 배웠으며, 높은 관리를 대하는 매너와 에티켓도 배웠다. 물론 교양과목 외에 필수전공인 사내 애간장을 녹이는 테크닉과 팜므파탈의 요술도 익혔다.
기생의 세계에도 등급이 있다.
일패 : 궁중에 출입하는 최고등급의 관기로서 얼마전에 인기리에 방영한 '대장금'과 같은 의녀를 말한다.
현대적 표현으로 탈렌트, 영화배우에 해당된다.
이패 : 지방 관아에 속해있는 기녀다.
춘향전에 나오는 대로 관리나 선비, 양반자제가 주 고객이다. 요즘말로하면 룸싸롱의 언니다.
삼패 : 이 부류는 생활기생이라고 한다. 약속다방의 김양이나 퇴폐주점의 마담이다.
진주에는 일패와 이패가 주류를 이루었다.
당연히 이들을 가르치는 학교인 교방이란 것이 있었다.
성리학이 시퍼렇게 살아있는 조선시대의 특목고로서 관기(官妓)제도가 없어질 때 까지 있었다고 하니 진주가 확실히 교육도시인 것이 사실이다. 일제시대에는 권번이라고 불렀고 그 후로 기생조합으로 변천했다.
현재 KT진주지사 자리가 조선 시대 진주목사가 업무를 보던 관청이었다. 진주 목사 관사 맞은편에 '진주교방' 이 있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시청옆에 시청소속 룸싸롱이 있었다는 것이다. 현재 갤러리아백화점 주차장이 바로 교방터이다.
그 곳은 풍수지리상 음기(陰氣)가 가득한 곳으로 먼 옛날 선비들을 유혹하는 도화기운(桃花氣運)이 있기 때문에 감수성이 예민한 남학생들이 그곳을 다녀오면 마음이 싱숭생숭하여 정신집중이 안된다.
나이가 지긋한 중년이후의 남정은 음기를 받아 좋다.
이곳에서는 풍류가 넘치고 문화가 있다. 진주교방에서 전승한 무형문화재중에 진주검무, 진주포구락무, 진주교방굿거리춤, 진주한량무가 있다.
조선 말기에 진주교방이 폐지되자 진주 관기들이 생업을 위해 기생조합을 결성했다.조합을 일본용어로 권번이라 했는데 전국적으로 많이 생겼다. 지금의 우리은행 진주지점 뒤편 차없는 거리에 권번터임을 알리는 표지가 세워져 있는데 온갖 좋은 소리만 써 놨다.
일본인이 쓴 <진주대관>에서 따르면 '시내 중심가인 대안동에서 진주예기 권번, 그곳은 평양에 겨룰 수 있을 만큼 규모가 대단했는데 500평 가량의 큰 기와집에 넓은 마당, 대청마루, 소리, 가야금과 춤을 배우던 큰 연습방이 3개나 됐다'고 하니 지금의 SM 타워 정도 되었는지 짐작만 해본다.
진주 기생의 대표격으로 논개(論介)가 있다.
논개를 칭할 때 반드시 의기(義妓)라고 한다.
기생이 갖추어야할 핵심역량이 미(美). 가(歌). 무(舞). 창(唱)인데 논개가 노래를 잘 부르고 춤을 잘 췄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영정사진을 보면 수심이 가득 차 있는 40대의 중년으로 보인다. 논개가 순국할때 19세이니
황진이나 춘향과 비교하면 노숙해 보인다.
논개는 전북 장수 출신으로 4갑술생 사주를 가졌다.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 로서 굉장히 드문 사주를 가졌다. 경상도 사투리로 '낳다'를 '놓다'라고 하는데
논개가 태어날 시점에 서당의 훈장을 하던 아버지가 만세력을 놓고 사주를 계산해보니 온통 개판이어서 개를 놓았다고 해서 논개라고 불렀단다. 진주에서는 '논개제'와 논개시장 등 논개 브랜드로 의기(義妓)의 기백을 이어가고 있다.
의기 논개 말고도 역대 진주기생으로는 승이교(勝二喬)· 계향(桂香). 매화(梅花), 옥선(玉仙)등 빼어난 명기(名妓)들이 있었다.
'조선해어화사'등에 진주기생에 대한 기록들이 보인다.
해어화(解語花)란 말을 할 줄 아는 꽃이란 뜻이다.
월정화(月精花)는 기록상 나타나는 진주 최초의 기녀다. 당시 진주 사록(司錄) 벼슬에 있던 위제만(魏齊萬)을 유혹해 그의 부인을 결국 울화병으로 죽게 만든 기녀다.
진주 사람들이 위제만의 부인을 추모하고 위제만의 방탕한 생활을 풍자하기 위해 불렀다는 '월정화'라는 고려가요의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진주난봉가'의 내용과 월정화의 이야기가 설화적 배경이 유사하다(중략).
만세운동에 참여한 진주기생 스토리도 있다.
진주 남강 변에서 1919년 3월 19일 진주기생들이 태극기를 선두로 촉석루를 향하여 독립만세를 외쳤다.
진주를 상징하는 또 하나의 기생이 있다.
바로 매국노를 꾸짖은 진주기생 산홍(山紅)이다
'매천야록' 에 “진주기생 산홍(山紅)은 얼굴이 아름답고 서예도 잘하였다. 이때 을사오적의 하나로 지목되는 매국노 이지용(李址鎔)이 천금을 가지고 와서 첩이 되어 줄 것을 요청하자. 산홍은 사양하기를, ‘세상 사람들이 대감을 5적의 우두머리라고 하는데 첩이 비록 천한 기생이긴 하지만 사람 구실하고 있는데, 어찌 역적의 첩이 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이지용이 크게 노하여 산홍을 때렸다.”라는 기록이 있다. 글도 잘 쓰고 얼굴도 예쁜 진주기생 산홍이 이지용의 첩이되길 거부한 것은 당시로서는 큰 사건이었으며 기생들의 자존감을 높혀 주는 일이었다.
이지용이 누구인가? 1905년 내무대신으로 을사조약에 적극 찬성하여 조약에 서명한 을사오적 중 한 사람이다. 1907년에는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었으니, 그 권세는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큼 대단하였다. 1906년 을사오적 이지용이 진주를 방문했다. 그가 진주를 방문한 흔적은 촉석루 벼랑에 그의 이름을 새겨 놓은 데서 알 수가 있다. 산홍이 역적의 첩이 될 수 없다고 거절한 일을 두고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절개를 칭찬해 마지않았으며, '매천야록'에 그때의 일을 기록해 두었다.
그 밖에 문헌상에 나오는 진주기녀들은
문신 안민영은 진주 기녀 난주(蘭珠)를 무척 총애했다. 그가 진주에 왔을 때 그녀를 위해 시조 2수를 지었으니, '진양기녀 난주를 칭찬하다(讚晋陽蘭珠)'와
'진양기녀 난주를 시제로 함(題晋陽妓蘭珠)'이다.
영변땅에서 망향가를 부른 진주기녀 채란도 있다.
김소월(金素月)은 오랜 방황 끝에 고향 영변으로 돌아와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돌보면서 소일하고 있었다. 그때 우연히 한 기녀를 만나게 된다.
이 기녀가 바로 진주가 고향인 채란이다. 고향과 천리나 떨어진 영변 땅의 채란은 고향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멀리 남쪽 고향 진주 땅을 바라보며 처연한 목소리로 '팔베개의 노래'를 부른다. 이때 김소월은 문득 담을 사이에 두고 골목길 저편에서 들려오는 슬프고 절절한 노래를 듣는다. 그리고 그 노래를 듣고 채록하여 '팔베개의 노래조(調)'라는 민요시를 지었다. 지금 전하는 것은 김소월의 시밖에 없으므로 채란이 불렀던 노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김소월에게 영향을 끼친것은 분명하다.
색향 진주를 풍류와 명기의 고장으로 도시를 리메이커하자.
조선조 말기 開化(개화) 기생들의 서예연습 © 함양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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