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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천의 歷史紀行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 감동적인 바위" (1)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8/12/10 [11:43]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이종천 재경 백전면 향우회 감사, 실용풍수학회 회장  © 함양신문

 

지난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 때 네팔 구르카족으로 구성된 싱가포르 특별 경찰팀 1500명이 경호를 담당했다. 구르카용병은 프랑스의 외인부대, 스위스용병과 함께 세계 3대 용병으로 불렸는데, 가장 용맹스런 용병은 구르카용병이고, 가장 충성스런 용병은 스위스용병이라고 한다.

 

국민소득 85000불의 선진국 스위스

스위스는 알프스, 만년설, 에메랄드빛 호수, 시계, 은행, 세계 제일의 관광명소이자 아름다운 나라지만 국민들은 용맹하고 애국심이 강해 이웃의 대국 프랑스와 독일도 감히 넘보지 못했다. 국토의 2/3가 산악이고, 자원도 없는 나라지만 현재 금융 산업이 세계 최고수준이고, 제네바에는 세계무역기구, 국제적십자사, 국제 보건기구, 국제 노동기구 등 30여 개의 국제기구가 있고, 250개의 NGO 단체가 있으며 1인당 국민소득 85000달러로서 세계 최상위그룹이지만 과거엔 가난한 나라였다.

스위스 용병

중세시대 스위스의 정부형태는 산악지형의 특성 상 중앙집권이 아닌 각 주의 독립적인 힘으로 군대를 양성하고 운영되었으며, 당시 스위스를 지배했던 합스부르크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수많은 전투를 치뤘고, 베테랑 병사들이 많이 양성되었다.

전쟁이 끝나자 주 정부는 병사들에게 충분한 보상을 해 주고 다른 나라에 용병집단을 빌려주는 방식으로 용병업을 운영했는데, 당시 스위스 사람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용병을 선망하여 경쟁이 치열했으며, 고용주에 대한 충성심도 강해 13세기엔 유럽 최고의 용병으로 이름을 날렸으며, 당시 전란을 많이 겪었던 이태리, 프랑스, 독일은 자연히 스위스 용병을 선호하였고, 그들은 어디로 파견되든 고용해준 나라를 위해 끝까지 싸우며 신의(信義)를 목숨보다 중하게 여겼다 한다.

교황청은 스위스 용병이 지킨다

1503년 로마 교황청의 요청으로 근위병’ 200명을 파견했으며,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로마를 점령, 약탈하자 다른 용병들은 모두 도망치고 스위스 근위대 189명만 남아 지키다 147명이 전사했다.

교황은 나머지 42명의 근위병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가라고 권고했지만 스위스 근위대는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키기 위해 성베드로 대성당에서 마지막까지 사투를 벌이면서 교황이 피신할 수 있게 도왔다. 이 사건 이후 바티칸 교황청의 근위대는 전부 스위스 출신으로 채워진다.

빈사의 사자 상

아름다운 호반도시 루체른의 작은 공원에 17928월 프랑스 혁명 당시 루이 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를 지키다 전멸한 스위스용병 786명의 충성을 기리기 위해 자연석을 쪼아서 조각한 사자상이 있다.

길이 10미터 높이 6미터의 빈사의 사자상은 스위스 용병을 상징하는 사자가 고통스럽게 최후를 맞이하는 모습을 묘사했으며, 사자의 발아래에 부르봉 왕가의 문장(흰 백합)이 새겨진 방패와 스위스를 상징하는 방패, 어깨에 창이 꽂혀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마크트웨인은 이 사자 기념비를 세계에서 가장 슬프고도 감동적인 바위라고 표현했으며,

가난했던 스위스의 용병들이 후손들을 위해 끝까지 신의를 지켰던 가슴 아픈 역사를 느끼게 하는 조각상이다.

프랑스혁명 당시 분노한 수 만의 파리 군중들이 튈리리 궁으로 진격하자 국왕 루이 16세를 지키던 프랑스 근위대는 도망갔지만 스위스용병들은 단 한 명도 이탈하지 않았고, 루이 16세가 철수해도 좋다고 했음에도 끝까지 왕을 지키다 죽었다.

혁명지도자들은 굳이 외국인 용병들은 죽일 필요가 없어서 항복을 권했고, 루이 16세의 뜻을 따랐다면 살 수도 있었으나 이들이 끝까지 싸운 이유는 죽은 병사의 품에서 나온 유서에서 발견 되었는데, “신의를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후손들이 용병으로 일할 수 없기 때문이라고 전한다.

당시 스위스인 들은 알프스산 아래서 숙박업 외에 특별히 할 수 있는 것이 없었기 때문에 용병으로 전장에서 돈을 벌어야 가족을 부양할 수 있었으며, 신용을 잃어 후손이 용병 일을 할 수 없게 될까봐 도망치지 않았던 것이다.

프랑스 혁명은 루이16세와 마리 앙뜨와네뜨 왕비를 교수형에 처하고 끝났지만 바뀐 정부도 계속 용병을 요청했다.

특히 나폴레옹이 러시아 원정에서 패하고 스위스용병 7000명이 700명으로 줄어드는 순간까지도 그들은 전장(戰場)을 이탈하지 않고 나폴레옹이 철군한 뒤에야 퇴각했다. 이렇듯 스위스 국민들은 신의를 후손들의 장래와 연결시켰다. 최근 스위스 정부에서 국민 1인당 월 300만원 씩 무상 지급하는 문제로 찬. 반 투표를 실시했는데 국민 78%의 반대로 부결됐다. “공짜로 돈 주면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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