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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물탐방] 東岡 김우옹 선생과 용강서당
1567년 명종때 별시문과 급제, ‘학문·정책 진언’ 선조 두터운 신임
 
함양신문 기사입력  2018/08/10 [17:00] ⓒ 함양신문 필자의 다른기사 보기 인쇄하기 메일로 보내기 글자 크게 글자 작게

 

 

 

 

 

▲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에 위치한 용강서원은 원래 용강서당이었는데 지난 2016년 3월 격상됐다. 사진은 용강서원 전경  © 함양신문


 

진주시 지수면 압사리에 있는 용강서원은 원래 용강서당이었는데 지난 20163월에 정호영, 이학진, 임용도, 김포환, 조규석, 하대규 등 경남유림과 동강 김우옹 선생의 15대 종손 김위, 종중대표 김종선씨를 비롯한 후손 등 70여명이 모여서 용강서당을 용강서원으로 격상하고 고유제례를 봉행했다.

동강(東岡)과 직봉포의(直峰布衣)라는 두 개의 호를 가진 김우옹 선생의 본관은 의성이며, 경북 성주(星州)에서 출생하였다. 시호는 문정(文貞)으로, 남명 조식의 문인이었던 그의 부친 김희삼(金希參)이 남명 조식과 친분이 두터워서 김우옹 선생이 15세 되던 해에 남명의 제자 오건(吳健)에게 학문을 배웠다. 그 후 24세때 남명의 외손녀와 혼인하기도 했다.

그는 1567년 명종때 별시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정자·이조판서·대제학 및 경연관(經筵官)을 역임하여 문정공(文貞公)의 시호를 받게 되었다.

지방 유림들이 그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서 용강서당을 창건했다. 특히 그는 명종과 선조때 여러 관직을 역임했던 훌륭한 학자이자 문신으로서, 1599년에는 한성부좌윤으로서 당시 모함에 빠진 류성룡을 위해 항소하여 그의 억울함을 풀어주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현재 경북 성주군 대가면에 가면 김우옹의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경북유형문화재 제260호인 동강 김우옹 신도비가 있기도 하다.

동강은 또 퇴계(退溪남명(南冥)선생에게 수확하여 문장과 도학으로 명망이 높았고, 20권의 문집(文集)과 속강목(續綱目) 36권을 저술하였는데, 특히 속강목은 동양사에 대한 저술로 후세 사학도에게 크게 도움을 주고 있다. 문정공의 문집 판각(板刻) 600여 매가 경북 성주의 청천서원에 소장되어 있던 것을 1922년 이곳에 평정각이란 서고를 건립하여 보관하고 있다.

전체 배치는 크게 강학공간(講學空間), 사당(祠堂), 판각(板刻)을 보관한 전각(殿閣)3부분으로 구획되어 있다.

일반적으로 강학공간은 제일 앞에 놓여지고, 서당을 중심으로 재()가 놓여지는 자형 배치를 보이는데 여기서는 재가 생략된 형태이며, 그 뒤로 사당과 전각이 나란히 옆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당은 정면 5, 측면 2칸의 5량구조(五樑構造)이며 익공계(翼栱系)의 굴도리 형태를 한 팔작지붕 건물이다. 열 개의 분합문(分閤門)은 창살의 구성이 상당히 독특하며 아름답다.

 

식년문과 급제 붕당 폐해 논하기도

 

동강은 남명 선생의 외손자이자 문인으로 1558(명종 13) 진사가 되고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권지부정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나아가지 않았다. 1573년 홍문관정자가 되고, 이어서 수찬·부수찬을 거쳐 다시 수찬이 되었으나, 이두문(吏讀文)을 가르치는 책임자로서 학생들의 성적이 오르지 못한데 대한 문책을 받아 전적으로 좌천되었다. 1576년 부교리가 되고 이어 이조좌랑·사인 등을 지냈으며, 1579년에는 부응교가 되어 붕당의 폐를 논하였다. 그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하도록 되었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이듬해 선위사(宣慰使)로 일본 사신 겐소(玄蘇)를 맞이하였는데, 사신의 접대에 여악(女樂)을 금지하도록 진언하였다.

 

임진왜란 때 사면···병조참판 역임

1582년 홍문관직제학, 이듬해 대사성이 되고, 대사간을 거쳐 1584년 부제학이 된 뒤 전라도관찰사·안동부사를 역임하였다. 1589년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정여립(鄭汝立)과 조식의 문하에서 함께 수학하였다는 이유로 회령에 유배되었다가, 1592년 임진왜란으로 사면되어 의주 행재소(行在所)로 가서 승문원제조로 기용되고, 이어 병조참판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명나라 찬획(贊劃), 원황(袁黃)의 집반사(接伴使)가 되고, 이어 동지중추부사로 명나라의 경략(經略) 송응창(宋應昌)을 위한 문위사(問慰使)가 되었으며, 왕의 편지를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에게 전하였다. 그해 상호군을 거쳐 동지의금부사가 되어 왕을 호종하고 서울로 환도하여, 한성부좌윤·혜민서제조 등을 역임하였다. 1594년 대사성이 되고, 이어서 대사헌·이조참판을 거쳐 1597년 다시 대사성이 되었으며, 이어서 예조참판을 역임하였고 1599년 사직하고 인천에서 한거하다 이듬해 청주로 옮겨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    강신웅 본지 편집국장  © 함양신문


선조, 몸 약한 동강에게 하사

남명에게서 학문을 배우고, 관직에 나아가 경연에서 자주 학문적 문제와 정책에 진언하여 선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평소에 몸이 약한 관계로 선조로부터 내의원을 통한 약을 하사받기도 하였다. 1573년 부수찬으로서 경연에서 요순우탕(堯舜禹湯)의 심법(心法)을 역설하며 유교적 정치이념과 위정자의 정치도의를 밝히는 한편, 주경공부(主敬工夫)를 논하여 왕의 정신수양의 원리를 강조하였다. 이때, 왕명에 따라 <성학육잠 聖學六箴>을 올렸는데, 그 내용은 정지(定志강학(講學경신(敬身극기(克己친군자(親君子원소인(遠小人) 등으로 되어 있고, 송나라의 학자 장식(張栻), 명나라의 학자 설선(薛瑄)의 문집을 간행할 것을 청하여 이의 실현을 보았다. 대사성으로 있을 때에는 <학제칠조 學制七條>를 손수 지었다. 선학을 존경하였으며 널리 인재를 등용할 것을 주장하여 1574년에는 정구(鄭逑)를 천거하고, 1595년에는 곽재우(郭再祐) 33인을 천거했다. 1661(현종 2)에 문집이 간행되었으며 1723(경종 3)에는 이현일(李玄逸)이 지은 신도비가 세워졌고 저서로는 동강집(東岡集속자치통감강목(續資治通鑑綱目) 등을 지었으며, 편서로 경연강의(經筵講義)가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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