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정신은 윗선에 대해서는 불의에 굴하지 않고 아랫사람에게는 관용과 자비를 베풀어야 함이다. 그 대표인물로 이황(李滉)은 선비를 세력과 지위에 굴하지 않는 존재로 지적하였다. 그는 선비의 입장을 세속적 권세에 대조시켜서, “저들이 부유함으로 한다면 나는 인(仁)으로 하며, 저들이 벼슬로 한다면 나는 의(義)로써 한다.”라고 특징지었다. 선비는 유교이념을 수호하는 임무를 지녔기 때문에 유교이념 자체가 바로 선비정신의 핵심을 이룬다. 선비는 부(富)와 귀(貴)의 세속적 가치를 따르지 않고, 인의(仁義)의 유교이념을 신봉하였다. ‘인(仁)’이 선비의 기본이념임에 틀림없지만 역사적으로 선비가 강하게 자신의 입장을 드러내는 것은 ‘의(義)’를 추구하는 의리(義理)정신으로 나타난다. 공자가 “군자는 의리에 밝고 소인은 이익에 밝다.”라고 한 주장에서 의리와 이익이 대립되는 ‘의리지변’(義利之辨)과 군자와 소인이 대립되는 ‘군자소인지변’의 분별의식이 명백히 확립되었다. “살기 위하여 ‘인’을 해치지 않으며, 죽음으로써 ‘인’을 이룬다.”라고 지사(志士)를 규정한 공자의 언급에서도 선비는 생명보다 더욱 귀한 가치를 신봉하고 있음이 보여 진다. 신라의 화랑들이 무사에 가깝고 선비라 하기에는 어렵다 하더라도, 그들의 정신에서는 선비의 신념을 엿볼 수 있다. 선비는 주로 문사(文士)를 말하지만, 무사(武士) 또한 ‘사’의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삼강오륜의 도덕규범을 불변의 강상이라 받아들이고 이 강상을 의리의 중요한 형식으로 확인하는 것은 선비의 신념으로 이해될 수 있다. 따라서 세조가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을 때 절의를 지켰던 사육신이나 생육신 등의 태도는 선비의 의리정신을 실천한 모범으로 추존되었다. 여성들에게는 효도와 충성에 더하여 정절이 요구되며, 강상을 지키며 학행이 갖추어질 때 ‘여사’(女士)라 일컬어지기도 한다. 유교이념에서는 의리의 가장 큰 문제로서 정통과 이단을 구별하고 중화문화와 오랑캐를 가려서 정통을 존중하고 중화문화를 지킬 것을 요구한다. 중화문화를 존숭하는 태도는 이른바 사대주의를 심화시켜서, 선비들이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진 경우가 많았다. 그렇다고 조선시대 선비들이 사대주의에 젖어서 자신의 국가를 잊은 것은 아니다. 다만 유교이념의 중국 중심주의적 해석에 끌려들어서, 자신의 국가를 변방의 제후국이라는 하위적인 위치에 두고, 중국을 높이며 중국문화를 이상으로 받드는 예속적인 한계점을 보여 왔다.
선비들의 의리정신은 타민족의 침략을 당할 경우, 침략자를 불의한 집단으로 규정하고 의리에 따라 이에 항거하려는 태도로 표출되었다. 임진왜란 당시, 선비들의 항전을 의병(義兵)으로 인식함은 당연하였다. 병자호란 때에 화친과 항복을 끝까지 거부하던 척화론(斥和論)은 선비의 의리정신을 보여주었다. ‘척화삼학자’의 한 사람인 홍익한(洪翼漢)은 심양에 끌려가서 청태종의 심문을 받을 때에도 “내가 지키는 것은 대의(大義)일 따름이니 성패와 존망은 논할 것이 없다.”고까지 대답하며 굴복하지 않다가 순절하였다. 이들이 나라의 위기를 당하여 항거할 수 있었던 것은 나라를 지키는 것이 의리에 합당하다는 신념으로 강인한 선비정신을 보여주었다. 인조가 병자호란에서 항복하는 굴욕을 당한 후, 만주족인 청나라에 대한 복수·설치(雪恥)의식이 이 시대 선비들의 의리정신에 가장 중요한 과제를 이루었다. 의리는 정당성을 제시하며, 선비는 이 정당성의 명령에 따라 어떠한 고난도 감수하고 자신의 태도를 결코 굽히지 않는 선비정신은 의리정신으로 표현되는 데서 그 강인성이 드러난 것이다. 신라 때 죽죽(竹竹)도 대야성에서 백제 군사에 의하여 성이 함락될 때까지 항전하다가 항복을 권유받자, “나의 아버지가 나에게 죽죽이라 이름지어준 것은 내가 추운 겨울에도 잎이 지지 않으며 부러질 지언 정 굽힐 수 없도록 하려는 것이다. 어찌 죽음을 두려워하여 살아서 항복할 수 있겠는가.”라고 결의를 밝혔다. 여기서 소나무와 대나무가 겨울이 되어도 잎이 지지 않는 사실을 들어 지조의 변함없음을 비유한 공자의 말씀은 선비정신의 강인한 지속성을 잘 보여주는 것이다. 이황은 선비의 당당한 모습을 가리켜, “선비는 필부로서 천자와 벗하여도 참람하지 않고, 왕이나 공경(公卿)으로서 빈곤한 선비에게 몸을 굽히더라도 욕되지 않다 했다. 그는 또한 “선비는 예법과 의리의 바탕이며 사회적 생명력의 원천이라 본다. 선비는 신분적 존재를 훨씬 넘어서 하나의 생명력이요 의리정신의 담당자임을 밝힌 것이다. 선비의 행동과 사회적 기능에서 보아도 선비는 유교이념을 신념으로 지키고 실현할 것을 추구하는 인격적 주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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